본디 공부에는 목적이 없다. 역사적 흐름에 목적이 없듯이 삶의 목적은 ‘삶 그 자체’이다.
앎의 여정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입시가 목적이 되면,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공부는 끝이 나고, 출세가 목적이면 그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 배움은 종결될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의 목표를 향해 열성적으로 다가가는 공부는 참으로 비루하다.
공부를 해 보면 안다. 앎은 그 어떤 보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길 위해서는 남보다 더 나은 과정도 더 빠른 과정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길을 '자기 속도로 걷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공부이다.

명리학적으로 풀이해 보면 더 분명해진다.
운명의 첫 번째 스텝인 식상(食傷, 식신-상관)은 앎의 의지와 욕망이다. 이것은 일종의 잠재태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흐를 수 있다.
그 다음 스텝이 재성(財性, 정재-편재)이다. 재성은 내가 다스리고 조정하는 물질적 세계이다. 만약 여기서 멈추면 그때의 앎은 그저 정보로 화한다. 이것은 화폐로 교환되는 순간 모두 고갈되어 버리고 만다. 지식 혹은 기술지가 거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스텝인 관성(官性, 정관-편관)으로 나아갈 때 지식은 비로소 지성으로 변주된다. 관성은 내가 책임지는 현장이다.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다. 지성이 리더십의 원천인 것도 이런 맥락이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리더십은 방심하는 순간 권력이 된다. 요컨대 앎이 지식에서 멈추면 화폐로 환원되고, 지성에서 멈추면 계몽적인 권위가 된다.
그래서 관성은 다음 단계인 인성(印性, 정인-편인)으로 '통해야' 한다. 인성은 지혜의 영역이다. 지혜는 죽음, 혹은 유한성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욕망(식상)과 화폐(재성)와 권력(관성)은 졸지에 무화된다.
비움과 버림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앎의 경계.
그것이 바로 인생의 지혜이자 '무용지용'의 도이다.
앎은 흘러야 한다. 식상에서 재성으로, 재성에서 관인상생으로,
그리하여 참 공부는 언제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고,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참고도서]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고미숙 저)

신은정 (체인지TV 책임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