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군 양렬공 정인경선생기념사업회 이성 회장이 최근 국학원을 방문하여 역사전시관을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국조단군상 등을 둘러보았다. 이성 회장은 한서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낸 공학박사.  

서산군 양렬공 정인경선생기념사업회 이성 회장이 최근 국학원을 방문하여 역사전시관을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국조단군상 등을 둘러보았다. [사진=김성미 기자]
서산군 양렬공 정인경선생기념사업회 이성 회장이 최근 국학원을 방문하여 역사전시관을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국조단군상 등을 둘러보았다. [사진=김성미 기자]

 

 

 이성 회장은 "국학원을 둘러보며 패배의식적 역사관과 속국의식 사대주의에 빠져 살아온 지난 세월을 털고, 유구한 역사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라는 중심 철학을 가진 대한민국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며 "국학원이 중심이 되어 우리민족의 홍익인간 중심 철학이 바로 세워지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성 회장으로부터 우리 국민이 가져야 역사의식, 가치, 한류 등에 관해 들었다. 
  
 우리가 바로세우고 가져야 할 대한민국의 정체성, 가치는 무엇일까요?

  환인, 환웅, 단군 할아버지의 삼한(韓)을 계승하여 이어온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국가를 지향하는 대한(韓)민국의 국호는 조선 고종 때의 대한(韓)제국에서 유래합니다. 이전 ‘조선’이라는 국호는 이성계가 명나라에게 청하여 이름을 선택받았기 때문에 이 이름에는 사대주의가 포함되어 있어 고종은 이름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대한의 “大” 자는 대청제국, 대일본제국, 대영제국 등 제국 앞에 관용적으로 붙여진 접사로 우리나라도 “대”라는 접두어를 넣었어요. “민국”은 민주정치를 시행하는 나라,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국가 이름은 “韓”이며 1887년 당시 제국의 이름은 한 글자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중국은 대표적인 황제국으로서 송, 원, 명, 청나라 등이고 주변 국가 이름은 조선, 일본, 돌궐, 흉노 등 모두 두 글자로 당시 조선 사람들은 제국의 이름은 한 글자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한국의 이름을 “韓”이라는 국호가 탄생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처럼 환인, 환웅, 단군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건국이념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홍익의 가치인 공생, 공존의 국민의식으로 분열된 남북을 통일하고 새로운 한민족의 탄생과 지구공동체를 이끌어갈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세계에 한류 열풍이 대단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니까?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이 여섯 멤버가 건학이념이 ‘홍익인간’인 글로벌사이버대학의 졸업생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홍익의 가치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인에게 꼭 필요한 정신이기에 BTS, 그리고 K-팝, K-드라마가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회장님께선 어렵게 공부를 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요?

저는 중학교 졸업하고 2년 동안 대가족의 가장 노릇을 하였습니다. 큰형은 병역의무 중이고 둘째 형은 외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삼남인 저는 고등학교에 갈 여유가 없어 2년 동안 소, 돼지, 닭을 키워서 번 돈으로 겨우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절 고생과 깨달음이 나중에 정신적으로 큰 자양분이 되었어요. 나를 희생할 수도 있다는 가족애와 민족과 나라에 대한 피끓는 충성심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어요.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에서 4년간 교비장학생으로 공부를 했고, 또 서독에 기술 파견실습생으로 가서 본(Bonn)대학과 베를린(Berlin)공과대학교에서 공학석사·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 그 2년 동안의 경험이 큰 힘이 됐어요. 대학교수가 될 때까지 20여년 간 대학입학등록금 2회를 제외하면 전액 장학금 혜택을 받았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선택하면 이루어진다”는 뇌사용 법칙(BOS)이 실현된 것이라 봅니다. 꿈과 희망을 갖고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서산군 양렬공 정인경선생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인경 선생은 어떤 분인가요?

  한민족을 위해 홍익을 실천한 위인 중 한 분이 정인경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인경(1237~1305) 선생은 고려 때 분인데, 남송의 성리학자 부친 정신보(鄭臣保?~ 1271)가 몽골 원나라로부터 세조 쿠빌라이의 신하가 되라고 요구하자 거절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1237년에 고려 간월도에 정착하여 낳은 귀화 1세대 아들입니다. 

이성 회장은 우리나라가 홍익의 가치인 공생, 공존의 국민의식으로 분열된 남북을 통일하고 새로운 한민족의 탄생과 지구공동체를 이끌어갈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성미 기자] 
이성 회장은 우리나라가 홍익의 가치인 공생, 공존의 국민의식으로 분열된 남북을 통일하고 새로운 한민족의 탄생과 지구공동체를 이끌어갈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성미 기자] 

  정인경 선생이 왕권을 수호하고 몽고와의 전쟁에서 끌려간 동포를 환향시키고 빼앗긴 국토를 모두 회복하였습니다. 그 공으로 노비와 전답을 하사받고 서산군의 작위를 받으며 본관이 서산으로 봉해져 그 후손은 서산 정씨가 됩니다. 하사받은 전답과 노비 일부를 공물로 바쳐 폐허된 군을 서산군으로 복군하였습니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몽고군 침공시기에 서산지역이 102년(1182~1284)동안이나 관호를 박탈당했는데, 이렇게 복원되었습니다. 
이후에 지역에서 선생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400여년 동안 시민에 의해 고유제를 지내오다가 임진왜란 이후 끊어졌고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정인경 선생은 중국어, 몽골어, 한국어에 유창한 언어의 마술사로 정치 외교에 능하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빼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 정신보가 고려에 처음으로 가져와 가학(家學)으로 배운 성리학의 의리 사상을 후손에 길이 귀감이 되게 하였다.

 또한 정인경 선생은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을 만나 《삼국유사》를 저술하도록 하고 친구 안향(安珦)을 충렬왕에 추천하여 고려 유학제거(성균관 관장)에 제수하게 하고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도록 권하여 안향으로 하여금 주자학을 연구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아버지 정신보가 들여온 남송의 성리학이 안향이 원나라에서 필사해온 것보다 53년 앞섭니다. 

정인경 선생은 생전에 받은 작위가 서산군(瑞山君)이고 사후에 받은 시호는 양렬공으로 부자가 모두 중국 절강성 강남제일가(江南第一家)에도 배향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념사업회에서는 성리학전래비 등 유적비를 세우고 기념관 설립을 추진중입니다. 홍익을 실천한 정인경 선생을 기념하고 후대에 그 정신을 알리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