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주년 광복절 맞아 임장택 선생 등 독립유공자 351명 포상
제75주년 광복절 맞아 임장택 선생 등 독립유공자 351명 포상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0.08.14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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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152명, 건국포장 29명, 대통령표창 170명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제75주년 광복절(8.15)을 맞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호남 일대에서 전해산(全海山) 의진의 선봉장으로 군수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임장택(林長澤) 선생 등 351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52명(독립장 1, 애국장 48, 애족장 103), 건국포장 29명, 대통령표창 170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11명이다.

건국훈장 임장택 선생 관련 자료. 1909년 8월 나주헌병분견소장이 한국통감부에 올린 보고서. 밑줄 친 부분에 따르면, 임장택 선생은 전해산 의병장의 선봉장으로 전해산을 개별적으로 따르는 부하들을 수합하기 위해 전북 진안에 갔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건국훈장 임장택 선생 관련 자료. 1909년 8월 나주헌병분견소장이 한국통감부에 올린 보고서. 밑줄 친 부분에 따르면, 임장택 선생은 전해산 의병장의 선봉장으로 전해산을 개별적으로 따르는 부하들을 수합하기 위해 전북 진안에 갔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훈장·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5주년 광복절 정부기념식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 임장택(林長澤) 선생은 전남과 전북 일대에서 전해산(全海山)(1962 대통령장) 의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선생은 전남 영광 출신으로 전해산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선봉장으로 일본인 처단과 의병투쟁을 위한 군수품 모집을 위해 활약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전해산 의진의 선봉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조직화하는 데 탁월한 공로자였다. 1909년 8월 일본헌병대 나주 헌병분견소장이 한국통감부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전해산의 선봉장 임장택은 전해산을 수령으로 따르는 부하의 통일을 계획하고자 동 수괴의 향리인 전라북도 진안으로 갔다”(『통감부문서』1909.8.2.)라고 기술하였다.
선생은 전해산 의진에 대한 일본군의 추격 작전 중 탈취된 의병 ‘명부’로 신상이 노출되었다. 일제의 의병탄압을 기록한『폭도에 관한 편책』에 따르면 일본군 광주수비대가 의병을 추격하면서 노획한 명부에 선생의 성명과 연령(27세), 거주지(전남 나주 화동) 등이 포함되었다. 선생은 1910년 2월 7일 당시 30세로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포상은「수형인명부」를 발굴하고 호남의병에 대한 정책연구용역을 통해 자료를 보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김희인 선생의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7. 7). 밑줄 친 부분에 따르면, 1919년 3월 23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군중과 함께 화천 읍내로 행진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자료=국가보훈처]
김희인 선생의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7. 7). 밑줄 친 부분에 따르면, 1919년 3월 23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군중과 함께 화천 읍내로 행진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자료=국가보훈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부친과 함께 옥고를 치른 김희인(金熙仁)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천도교도이기도 한 선생은 1919년 3월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에서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초 화천읍 만세시위는 부친인 김창희(金昌羲) 선생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손병희(孫秉熙) 등의 조선독립선언 계획에 찬동한 김창희는 화천읍 장날인 1919년 3월 23일을 기해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깃발을 만들어 각 리(里)에도 연락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 계획에 따라 선생 등은 거사 당일 “조선 독립국 만세”, “화천면민단 대표자 김창희, 이은규 외 1명”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화천읍내를 행진하였다. 선생에 대해서는 그 동안 심사에서 독립운동 자료상의 김희인(金熙仁)과 호적상의 이름이 상이하여 포상이 보류되었으나 선산김씨 족보(1960) 등을 보완하여 검토한 결과 동일인임이 확인되어 포상이 이루어졌다.

화천군 화천읍 만세운동을 주도한 공로로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부친에 이어, 차남인 선생께도 애족장이 추서됨으로써 영예로운 부자(父子) 독립유공자 가문이 탄생한 사례이다.

3․1운동 직후 여성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박치은(朴致恩)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8월 평남 강서군에서 대한애국부인회 증산지회(甑山支會) 재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이듬해 8월 동 지회 재무 및 서기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 때 선생의 노모와 형제자매 등 일가족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는데, 애석하게도 모친을 도와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조력했던 장남 최창익(崔昌翊) 선생은 미결수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자마자 22세의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다. 최창익 선생께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평남 평양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기독교 장로교파 애국부인회와 감리교파 애국부인회가 동년 11월 연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원조를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으로 최순덕(崔順德)(’95 애족장), 박승일(朴昇一)(’13 애족장), 송성겸(宋聖謙)(’18 건국포장) 선생 등이 서훈을 받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돕기 위해 모자(母子)가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위해 헌신한 흔치 않은 사례로 꼽힌다.

1920년대 후반 평북 의주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김중신(金仲信)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비밀결사 조선독립단에 가입하고 의주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의 중형을 받았다. 선생이 소속된 ‘조선독립단’은 1920년대 초반 결성된 중국 관전현에 근거를 둔 비밀결사로, 이 단체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으로 고기용(高基用), 김만재(金萬財) 선생이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권총으로 무장까지 한 이들의 활동은 군자금 모집 대상이 당시 신문에 보도된 것만 12곳에 달할 정도로 맹렬했다(『동아일보』1927.4.3.). 선생에 대한 포상은 『동아일보』와 「가출옥관계서류」등의 자료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의주의 빈농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유년시절부터 노동을 하며 각지를 전전하면서도 조국독립을 위해 바친 선생의 삶은 모두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3․1운동 직후 여성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박치은(朴致恩)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8월 평남 강서군에서 대한애국부인회 증산지회(甑山支會) 재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이듬해 8월 동 지회 재무 및 서기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 때 선생의 노모와 형제자매 등 일가족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는데, 애석하게도 모친을 도와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조력했던 장남 최창익(崔昌翊) 선생은 미결수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자마자 22세의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다. 최창익 선생께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평남 평양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기독교 장로교파 애국부인회와 감리교파 애국부인회가 동년 11월 연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원조를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으로 최순덕(崔順德)(’95 애족장), 박승일(朴昇一)(’13 애족장), 송성겸(宋聖謙)(’18 건국포장) 선생 등이 서훈을 받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돕기 위해 모자(母子)가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위해 헌신한 흔치 않은 사례로 꼽힌다.

오랜 기간 이역만리 한인 여성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 전(全) 그레이스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가 개최한 ‘경술국치’ 행사에 참여한 이래 1919년부터 1942년까지 샌프란시스코 한국부인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 동 회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델라노지부 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선생의 남편인 전득부(全得富) 선생 또한 1907년부터 1945년까지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원 및 동 북미지방총회 구제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여러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한 공로로 2015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역만리 미주에서 노동으로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헌신한 부부 독립운동가의 모범을 보여준다.

3명의 영국인 IFBU(India Field Broadcasting Unit)대원과 6명의 한국광복군, 그리고 R. C. Bacon 선생이 함께 인도 Fagu에서 1944년 12월에 찍은 사진. 앞 줄 왼쪽부터 Lt Col Steer, 김성호, 문응국(추정), 미상(未詳), 뒷줄 왼쪽부터 Capt Preston, Mollison, 김상준, 한지성, 나동규, R. C. Bacon 선생.  출처 : R.C.Bacon 선생의 유족이 국가보훈처에 제공한 자료. [ 사진=국가보훈처]
3명의 영국인 IFBU(India Field Broadcasting Unit)대원과 6명의 한국광복군, 그리고 R. C. Bacon 선생이 함께 인도 Fagu에서 1944년 12월에 찍은 사진. 앞 줄 왼쪽부터 Lt Col Steer, 김성호, 문응국(추정), 미상(未詳), 뒷줄 왼쪽부터 Capt Preston, Mollison, 김상준, 한지성, 나동규, R. C. Bacon 선생. 출처 : R.C.Bacon 선생의 유족이 국가보훈처에 제공한 자료. [ 사진=국가보훈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인도-버마전선에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연락장교(대위)로 활약한 R.C.베이컨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43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인도주재 영국군 장교로 S.O.E(Special Operation Executive)에 소속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와 연락업무를 담당하며 대적(對敵) 선무공작 및 문서번역 등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캐나다 출신인 베이컨은 한국에서 10년간 기독교 감리교회 선교사로 활동하여 한국어가 유창했고 인면전구공작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45년 3월 13일 전사할 때까지 S.O.E의 136부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0월 26일부터 1944년 9월 15일까지 한국광복군 연락장교로 활약했고, 전지선전대(IFBU)에 소속되었다.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요청하여 인도-버마전선에 파견된 부대로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대일전에 참전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선생의 활약상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과 영국 간 공동작전의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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