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의 자손이라고 하면 강화도 마리산을 오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매년 개천절에는 참성단에서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된다. 태백산 천제단과 함께 참성단은 천제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기 전 고故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이 건립한 단단학회 단군성전을 만나보자.

 
▲ 강화도 마리산 단단학회 입구(사진=윤한주 기자)
 
입구에서 참성단로로 20분 정도 걸으면 교회 건물이 보인다. 오른쪽 체육시설이 있는 골목길을 오르면 단군성전 안내판이 나온다. 이사를 앞둔 집이라고 할까? 정돈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불에 탄 건물도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김천희 환인환웅단군성전 당주는 불이 난 곳은 숙식을 해결하던 ‘요사채’였다고 한다. 주위엔 산신각, 칠성용궁 등이 있다. 
 
▲ 강화도 마리산 단단학회 개천각 오르는 길(사진=윤한주 기자)
 
그렇다면 단군은 어디에 있는가? 김 당주의 안내를 받고 사당인 개천각(開天閣)으로 갔다. 《대시전(大始殿)》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어보니, “높은 어르신들을 모신 곳”이라고 김 당주가 답했다. 성전의 문을 열자 환웅(桓雄)상을 중심으로 여러 시조와 위인들의 영정이 좌우로 있었다. 
 
왜 단군이 아니고 환웅일까? 그 답은 《대시전》이라는 현판에 있었다. 고려 말 이암(杏村 李嵒, 1297 ~ 1364)의 《단군세기(檀君世記)》에 나온다. 이 책은 1911년 독립운동가 계연수(桂延壽, ? ~ 1920)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수록되었고 이유립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다음은 11대 도해 단군 재위 57년의 기록이다.
 
▲ 강화도 마리산 단단학회 개천각 전경(사진=윤한주 기자)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환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한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 하였다.” 
 
따라서 단군이 환웅을 모셨듯이, 이유립 씨 또한 그대로 세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 단단학회는 역사의 정통을 환웅의 배달국부터 단군조선―북부여(원시 고구려)―고구려(본 고구려)―대진(大震, 중 고구려)―고려(후 고구려)―조선―임시정부를 거쳐 현재의 대한민국에 이른 것으로 본다. 그 시대와 관련한 왕과 문인, 무장을 모시고 있다.
 
▲ 강화도 마리산 단단학회 개천각 내 환웅상(사진=윤한주 기자)
 
특히 제단 오른쪽엔 단단학회의 모체인 단학회(檀學會) 설립자 이기(李沂, 1848~1909)부터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신채호(申采浩, 1880~1936), 계연수까지 커발한 대종사(大宗師)라는 직함을 달았다. 이유립은 커발한 개천각 설립자로 소개하였다. 이유립은 1965년에는 기관지 ≪커발한≫을 창간하였고, 1996년에는 단단학회로 이름을 바꾼 인물이다.
 
개천각은 1969년에 단촌 이석영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다. 이유립이 타계하고 부인인 신매녀(申梅女·95)씨가 관리하였다. 매년 3월 16일 삼신일체의 기념일인 한맞이(大迎節)와 10월 3일 환웅님이 오신 날인 개천절에 제천의식을 해왔다.
 
▲ 개천각 오른쪽에 이기, 이상룡, 신채호 앞에 커발한 대종사라는 직함을 달았다(사진=윤한주 기자)
 
신 씨에 이어 성전을 맡은 김 당주는 1994년 꿈속에서 단군의 계시를 받고 마리산에 왔다고 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하다가 마침내 관리하는 자리에 오른 것. 그 배경에 대해서도 김 당주는 ‘인연’이라는 말로 대신하였다. 앞으로 요사채를 다시 건립하고 성전을 새롭게 가꿔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계속) 
 
■ 단단학회 커발한 개천각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로 675번길 151 
문의) 032-937-9939 / 010-9864-9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