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 백두산이 있다면 남한에는 태백산이 있다. 강원 태백시는 10월 3일 개천절에 천제를 봉행하고 있다.(사진=태백시청)

전국 방방곡곡에 단군성전이 있다고 하지만, 산 아래 성전을 건립한 경우는 드물다. 연 60만 명이 찾는 태백산(太白山, 1,560m)에 자리한 단군성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올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자 방문객은 100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들이 태백산과 함께 단군성전을 방문할 것이다. 태백산과 함께 성전 안내판에는 담겨 있지 않은 역사를 살펴본다.

북한의 백두산 vs 남한의 태백산
 
먼저 태백산에 관해 알아보자. 
 
고려 말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고 밝혔다. 태백산은 영변의 묘향산이라고 적은 것이다. 조선왕조의 유학자들도 아무런 의심 없이 일연의 설을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태백산이 묘향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조선 숙종 때 인물인 북애자(北崖子)가 1675년에 펴낸 《규원사화》에서다. 그는 백두산에 비하면 묘향산은 큰 웅덩이도 없는 작은 산인데 신령스러운 사람(=환웅)이 오르고 내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묘향산을 태백산으로 삼는 견해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라고 비판했다.
 
실학자 안정복(安鼎福) 또한 묘향산은 백두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삼국유사》에 밝힌 묘향산은 향목(香木)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불교적 명칭이고 이색의 《묘향산기》에 따르면 묘향산이 압록강 남쪽에 있고 요동과 경계를 이루어 장백산이 나눠지고 그 장백산에서 향목(香木)이 많이 산출되므로 묘향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고구려 유민이 북으로 태백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는데 그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을 지칭하므로 단군의 강림지는 백두산이라는 것이다.
 
특히 신채호(申采浩)는 1908년부터 백두산이 태백산이라는 주장을 언론을 통해 발표한다. 이때부터 백두산설이 확산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의 태백산은 어떻게 되는가? 
 
▲ 10월 3일 개천절 태백산 천제 봉행(사진=태백시청)
 
신라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이 쓴 <부도지(符都誌)>를 보면 실마리가 풀린다. 박혁거세가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고 가운데 봉우리에 천부단(天符壇)을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김강산 태백향토사연구소장은 《영산태백》에서 백두산을 북태백산, 강원남부의 태백산을 남태백산으로 삼한이전까지 불렀다고 보고 있다. 
 
천부소도는 삼한시대의 소도를 뜻한다. 주목되는 것은 태백산에는 지금도 소도라는 지명이 많다. 대부분 산당들도 소도천, 문곡소도동에 있다. 산 입구가 소도동이다. 특히 봉우리에 천부단 수축은 지금의 태백산 천제단과 연결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라 때는 오악(五岳) 중의 하나가 태백산이었다. 이곳이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 조선, 대일항쟁기 등을 지났지만 태백산 천제는 계속됐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태백산 천제단의 제사는 태백시민이 시작하지 않다는 점이다. 
 
천제단 제사의 갈등
 
▲ 태백산 단군성전 입구(사진=윤한주 기자)
 
대일항쟁기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면 붙잡혀가는 시대였다. 이어 6.25 한국전쟁과 태백산지역의 무장공비 토벌 등을 거치면서 태백산 천제단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못했다. 전쟁 중 국군에 의해 헬기장이 건설되면서 천제단이 헐리기도 했다.
 
김강산 소장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물야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우성조 씨는 민족사에 조예가 있었다”라며 “예로부터 이어져 오던 천제가 끊기고 천제단이 무너져 돌무더기로 방치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태백산을 등반하고 현장을 목격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물야면민들과 황지읍민, 장성읍민들을 설득해 수백 명의 회원을 모집했다. 천제단을 다시 쌓고 천제를 봉행하게 된 것이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의 불법종단, 성황단 등을 헐어 없애라는 지시를 내렸다. 천제단 제사 또한 졸지에 불법이 된 것. 우 씨는 천제가 보호를 받으려면 종단이 필요하다고 보고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다. 이에 강원도민이 우리는 대종교인이 되기 싫다고 해서 천제단 제사는 경상도와 강원도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김도현 박사(강원대학교 강사)는 “태백산 천제 운영에 대한 갈등으로 인해 인근에 있는 경상도와 강원도 사람들이 태백산 천제에 함께 참여하지 않고 각자 천제를 지내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고 지적했다.
 
▲ 태백산 단군성전 전경(사진=윤한주 기자)
 
태백산 천제는 1990년에서야 태백시 단독으로 치르게 되었다. 
 
당시 태백문화원 사무국장이었던 김 회장은 "하늘의 뜻인지 몰라도 추석이 겹치면서 다른 종교단체가 태백산에 오르지 않아 유일하게 천제를 올릴 수 있었다"라며 "이를 계기로 태백산 천제단은 화합과 번영을 기원하는 우리 민족의 제단으로 제자리를 찾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태백문화원은 한해도 빠짐없이 개천절이면 태백산 천제단에서 천제를 봉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대의 변화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용환렬 씨(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학 석사)는 "석탄산업으로 인한 인구가 태백시로 유입되면서 시로 승격되고 문화원이 생겨나고 경제가 활성화되고 태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는 등 주변의 변화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태백산 단군성전 내 단군영정(사진=윤한주 기자)
 
현재 단군성전을 관리하는 김창한 국조단군봉사회장은 당시 어르신들이 연세가 많고 천제단 제사하기가 힘들어서 단군성전을 건립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제단 제사 주도권에 대한 지역 갈등 속에 국조단군봉사회가 구성하게 된 것이다. 1982년 김대년 회장을 비롯한 시민의 성금으로 소도동에 단군성전을 세웠다.
 
김 회장은 가족과 함께 단군성전 옆에 거주하고 있다.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태백시의 지원을 받고 단군제례를 지내고 있다. 방문객은 등산객도 있지만 기도와 수행을 목적으로 찾는 이도 많다고 한다. 시민의 후원으로 무궁화를 심는 등 성전 관리에 노력을 다하고 있다.
 
■ 태백산 단군성전 
 
강원 태백시 천제단길 221 , 033-552-9788
 
■ 참고문헌
 

김강산, 《[기고] 태백산 천제에 부쳐》, 참뉴스 2009년
김도현, 《사료로 읽는 태백산과 천제, 강원도민일보사 2009년
〈단기 4342년 개천절 맞는 김강산 태백향토사연구소장〉, 한국일보 2009년 10월 5일
용환열, 《민족성산 태백산의 정체성 형성과정》, 한국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이영화, 〈일제시기 단군을 둘러싼 한일간의 공방〉, 《한국사학사학보》 제22집, 한국사학사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