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이토오와 카스라가 번갈아 정권을 잡으면서 5년 동안 군비를 확장하였다. 세월이 흘러가서 1905년(을사년)은 고종42년 광무9년 (高宗42年 光武9年)되는 해였다.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하고 연해주와 요동반도에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은 일본에게 두통거리였다. 아시아의 열강이 되려는 일본은 언젠가 러시아와 충돌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토오는 러시아와 충돌을 피하면서 한반도를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정부에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문관 이노우에(井上馨)가 있었다. 그들은 자주 만났다.

“나의 생각은... 러시아의 태도로 보아서 극동에서 순순히 물러갈 상대가 아니므로 만주를 러시아에 맡기고 한국을 일본이 장악하는 방도를 타협 보는 것이 좋을 듯싶은데...”
 
이토오가 의견을 제시했다.  
 
“나의 생각도 같습니다.”
 
이노우에가 찬성했다. 이들은 문관이었으므로 외교적인 방책을 들고 나왔다.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여 한국을 굴복시키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방책을 들고 나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므로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와 대결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야마가카(山縣有朋)와 카쓰라(桂太郞) 등 군부출신의 보수파였다. 
 
보수파가 주장하는 대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대결보다 타협이 현실적으로 필요함으로 이토오의 주장대로 러시아와 외교적인 교섭을 벌였다. 1903년 8월에 일본은 러시아에 기초조건을 제시하면서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에 제시한 기초조건이 한국인에게는 지대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청국과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을 존중하며, 양국은 각국의 상공업을 위하여 기회균등주의를 유지하도록 서로 약속할 것. 
둘째, 러시아는 한국에서의 일본인의 우월한 이익을 인정하고, 일본은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우월한 이익을 승인한다. 
셋째, 양국은 서로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할 것,
넷째, 첫째의 항목에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 한국에서의 일본의 상공업상의 활동과 만주에서 러시아의 상공업상의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다섯째, 둘째 항목에서 규정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킬만한 반란의 진압을 위해서 일본은 한국에, 러시아는 만주에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그 군대는 필요한 병력을 초과할 수 없고, 또, 그 임무가 달성되었을 때는 바로 소환할 것.
여섯째, 한국에서의 개혁, 혹은 선정을 위한 조언과 원조는 일본의 특권에 속하게 할 것.
일곱째, 앞으로 한국의 철도를 만주 남부까지 연장해서 동 철도 및 우장, 산해관선에 접속시킬 경우에 이를 저해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일본은 이를 발판으로 한국에서 정치, 경제적인 권익을 확보하고, 기회를 보아서 만주까지도 진출하겠다는 속셈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10월에 일본의 안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해 왔다. 
 
첫째, 만주와 그 연안을 일본이 이익권 이외임을 승인할 것. 
둘째,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서로 존중한다고 약속할 것. 
셋째, 한국에서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하되, 그 영토의 일부라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대한해협의 자유 항해를 방해할 군사시설을 한국의 연안에 설치하지 않을 것 등을 서로 약속할 것.
넷째, 한국의 영토를 39도선에서 분할하여 그 이북을 중립지대로 하고, 양국의 어느 편이든 군대를 진입시킬 수 없도록 할 것. 등이었다. 
 
양국의 이러한 제의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들이 한반도에 욕심을 품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양국은 표면상 협상에 임했다. 그러면서도 전쟁준비에 바빴다. 러시아는 1903년 10월에 전쟁계획을 성안했고, 1904년 1월1일자로 황제의 재가를 받았다. 이 계획에 한국을 침공한다는 계획은 들어있지 않았다. 만주방어계획 속에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동청철도로 진격할 수 없게 한다는 국경지대방어계획이 들어 있었다. 일본도 1903년에 전쟁계획을 성안했다.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한국 전역, 아니면, 한성을 점령하고 이어서 남만주를 점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일본은 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주한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한국과 공수동맹을 맺으라고 지시했다. 일본은 제1군 소속의 제23여단에게 한반도 점령의 임무를 주었다. 여단장은 기고시(木越安綱) 소장이었다. 그가 인솔하는 보병 4개 대대로 편성된 선발대(호칭은 한국임시파견대였다)가 한국 정부가 친러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왕실과 정부를 장악하기 위하여 한성을 조기에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2월 6일 60여 척으로 편성된 제1, 제2 함대와 함께 사세호를 출발하였다. 연합함대가 4개 전대로 편성되었는데, 제1, 제2, 제3전대는 뤼순항(여순旅順港)으로 향하고, 순양함 6척과 어뢰정 8척으로 편성된 제4전대가 우리우(瓜生外吉) 소장 인솔 하에 인천항으로 향했다. 이때 인천항에는 러시아의 순향함 1척과 다른 함 1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의 우리우 소장은 러시아 함대가 9일 12시까지 인천항에서 퇴함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함 2척이 외항으로 퇴함하자, 일본함대는 8일 16시 20분 함포사격을 가하여 이들 함대를 인천 앞바다에 가라앉혔다. 가고시 여단 2,200명은 철야로 상륙하여, 2개 대대를 경비부대로 인천항에 남기고 9월 13일 한성 입성을 마쳤다. 그날 15시 30분에 일본공사 하야시가 고종을 알현하고 개전 이유를 설명하면서 한성은 일본군 점령 하에 들어갔다. 한국은 전혀 나라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군의 점령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였다. 2월 18일에 인천 경비부대 2개 대대와 다음 날 제12사단장 이노우에(井上光)가 사단 주력부대를 이끌고 한성으로 들어왔다. 23일 이노우에가 고종을 알현한 후에, 15시에 공수동맹인 ‘한일의정서’를 억압 하에 조인시켰다. 한일의정서는 6개 조항으로 짜여있었는데, 한국정부를 일본이 간섭하고 한국의 영토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군사목적에 영토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