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과 궁녀

그해 8월 20일, 새벽에 일본의 낭인 패거리와 군대가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와 황후를 시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일제의 비호 아래 권좌로 나오고, 친로파 내각을 몰아내고 친일내각이 들어서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분노하여, 의병이 각처에서 일어났고, 김홍집 내각은 의병 진압에 몰두하느라고 왕성 경비에 소홀했다. 이때, 친로파의 이범진 등과 러시아 공사 위베르 사이에 고종 일가를 궁성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었다. 광희 황제는 을미사변으로 황후가 시해 당했고, 궁을 일본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안전한 곳에 가 있기를 원하였다. 러시아는 공사관 경비를 강화한다는 구실로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군함으로부터 대포 1문과 수병 120명을 서울로 입성시켰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이범진은 고종에게 일제와 대원군과 친일파가 왕을 폐위하려 한다고 속이고, 궁녀들이 타는 교자에 왕세자와 함께 태워 러시아 공사관으로 몰래 탈출시켰다. 이범진, 이완용 등이 러시아 공관에서 고종을 영접했다. 이제부터 친러파의 조정이 되었다. 공사관 밖에는 인천에서 상륙한 120명의 러시아군이 대포 1문을 버티어 놓고 지키고 있었다. 친러파들은 만세를 불렀다. 나는 유체이탈 상태에서 이런 광경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었다.
 
“왕 곁에 가보고 싶은가?”
 
누군가 내 귀에 대고 말하였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있지 않았다.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가보고 싶습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기 위하여 말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상궁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직감으로 상궁이 내 5대조 이모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 5대조 이모는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는 5분 상궁 중의 한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본 적이 없지만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가 누구라는 것을 아십니까?”
 
나는 5대조 이모에게 물었다.  
 
“알지. 잘 알아. 그런데 여기는 왜 온 거냐?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사실 나는 무슨 이유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 저를 이리로 부른 것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왔으니 임금님을 알현하고 가야지.”
 
이왕 온 김에 고종을 인터뷰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와 면담을 해도 되겠습니까?”
“면담이라는 말을 쓰다니 무엄하구나.”
“그럼 알현이라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라. 그런데 내가 너를 믿어도 되겠느냐?”
“믿으세요. 제가 해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네가 내 집안의 혈통을 타고났다면 내가 믿어도 되겠지.” 
 
5대조 이모는 나를 데리고 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고종은 깊숙이 구석진 곳에 홀로 앉아 있었다. 시신들이 보이지 않았다. 5대조이모는 나를 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부복하였다. 
 
“네 번 절해라.”
 
5대조이모가 말했다. 나는 큰 절 한번을 하고 나서, 앉은 상태로 3번을 고두배叩頭拜로 절했다.  
 
“전하, 믿을만한 자를 데려왔습니다.”
 
5대조이모가 고종에게 말했다. 
 
“상궁이 대령하겠다고 한 자가 이 사람이냐?”
“그렇습니다.”
 
고종은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이리 가까이 오라.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느니라.”
 
나는 왕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은 개화가 된지 오래 되었으니 이 사람에게 의자를 내주라. 마주보고 앉도록 하자.”
“탁자로 가시지요.”
 
고종은 5대조이모가 말하는 대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탁자 앞에 앉았다. 창밖을 보니 이곳이 대궐이 아니었다. 러시아공사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종에게, 내가 쓰려고 하는 소설 『안중근 콤플렉스 힐링』에서 왕이 안태훈을 무혐의로 처분하셨다고 쓸 계획을 말하였다. 고종은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였다. 
 
“제가 책을 보내 드리면 읽어 주시겠습니까?”
“읽어 보겠다. 짐에게 1권을 보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책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책을 어떻게 보내면 되겠습니까?”
“소리 내어 읽어 주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역사에 보면, 조정에 왕이 믿을 만한 대신이 아무도 없었다. 백성을 수탈하는 자들,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대가 짐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고종이 뜻밖의 요구를 하였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내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데 내 곁에서 내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게.”
“제가요?”
“그래. 그대는 사건을 기록하거나 만들어 내는 작가가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다시 쓰는 일을 해 보게. 그리고 그것을 내게 읽어 주어.”
 
생각해 보니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그러나 이 자에게 줄만한 보직이 마땅한 것이 없습니다.”
 
5대조 이모가 말했다.
 
“걱정할 것이 없느니라. 내가 황제로 등극하면 그날 부로 그대를 짐의 시종무관으로 임명하겠다. 그러면 되겠지.”
 
왕은 그 말을 하고 스스로 만족해하였다. 고종은 1896년 9월 5일 대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였다.  
 
“복장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복장이 준비되지 않아서 걱정이 되어 물었다.
 
“김 상궁, 경무관 한환을 불러라.”
 
5대조 이모가 경무관 한환을 불러들였다. 경무관 한환이 대령했다.
 
“시종무관 복장을 준비해 주도록 하라.”
 
경무관 한환이 물러갔다가 경무관 복장을 한 벌 가지고 나타났다. 나는 그가 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자 졸지에 시종무관이 되었다.
 
“이제 시종무관이 되었으니 신고해라.”
 
5대조 이모가 말하였다. 나는 광희 황제에게 신고하였다. 마치 소꿉장난을 하는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친일파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 다섯 대신이 역적이니 잡아 죽이라.”
 
광희 황제가 갑자기 화가 난 음성으로 내게 명령하였다. 
 
“시종무관 가십시다.”
 
경무관 한환이 내게 말하였다. 
 
“어디에 가면 그들을 찾지요?”
 
나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밖으로 나가면 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무관 한환은 나를 데리고 덕수궁을 빠져나왔다. 백성들은 분노와 흥분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국왕이 아관파천俄館播遷에 파천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날뛰고 있나요?”
“이범진이 보부상들에게 명령을 내려,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요.”
“곧 살인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대신들을 참살할 계획이 다 서 있소.”
“그래요?”
“믿지 못하겠소? 시종무관!”
 
경무관 한환이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누군가 경무관 한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경무관 한환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순검이 김홍집과 정병하를 죽였습니다.” 라는 보고를 한 것이었다.
“잘 되었다. 전하에게 보고해야 하겠다.”
 
경무관 한환이 내게 말하였다. 우리는 러시아 공관으로 다시 갔다. 
 
“김홍집과 정병하가 성난 백성에게 참살 당했습니다.” 
“잘 되었다.”
 
고종이 말했다. 다음 날 학지부 대신 어윤중도 용인 사람들에게 참살 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