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 속으로 들어갔다. 을미년(1895)의 여름이 한창이었다. 왜적이 황후를 시해하기 직전에 안태훈은 정부양곡 횡령범橫領犯으로 몰려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그를 체포하려는 자들이 그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딱한 일이었다. 나는 안 의사의 부친을 돕기 위하여 뒤를 쫓아다녀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와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부친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기야 우리가 서로 대면한 적이 없으니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안 의사의 부친에게 나를 노출하기로 하였다. 나는 그 앞에 나타났다. 
 
“공은 뉘시오?”
“아드님하고 자주 만나는 사이로 동명이인同名異人입니다.”
“그렇소? 내 아들은 잘 있소?”
“잘 있습니다. 어제 부천에서 만나 막걸리도 한 잔 했습니다.”
“그렇군.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오셨소?”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안태훈 공에게 소상하게 말했다.

“나를 돕겠다니 고맙소.”
“제게 도움을 부탁할 일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를 잡겠다고 쫓아다니는 대한국의 마지막 경찰들을 쫓아 주시오. 나라가 없어진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나를 쫓아다니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소.”
“알겠습니다. 저들이 다시는 쫓아다니지 못하게 황제 폐하에게서 칙령을 받아내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오. 그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 공과 대한국 경찰들.

나는 안태훈 공이 말하는 대로 대한국 경찰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바라보니 대한제국의 경찰 복장을 한 사내들이 안 의사의 부친을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정지!”
 
나는 대한국의 경찰들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그들이 정지하였다.
 
“안태훈 공을 그만 쫓아다니시오. 내가 황제 폐하에게서 사면교지를 받았으니 그리 아시오.”
“황제 폐하의 사면교지를 보이시오.”
 
나는 교지 따위를 가진 것이 없었다.
 
“다음에 황제 폐하를 알현하여 사면교지를 받아 오겠소.”
“이제 우리도 범죄인을 추적하는 일에 지쳤소. 시면 교지를 받는다면 더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겠지. 우리는 이 공원의 문전에서 기다리겠소. 그러니 사면 교지를 받아오시오.”

그들이 추적을 유예한다니 우선 안심이 되었다.
 
“며칠만 기다리시오.”
“아까 내 아들이 어디에 있다고 하셨소?”
 
한숨 돌린 안 의사의 부친이 물었다.
 
“안 의사는 안중근 공원에 있습니다.”
“그거 잘 되었군.”

▲ 문차요비

 
나는 안 의사의 부친을 데리고 안중근 공원으로 갔다. 안중근 의사는 동상 위에 높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 공원에 괴기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부친을 뫼시고 왔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입대立臺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아버님을 뵙게 되어 뜻밖입니다. 이곳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를 잡으려는 자들을 피해 다니다가 여기로 오게 되었네.”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저자들이 나를 쫓아다닌 지 백년이 넘었네.”
 
안 의사의 부친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그를 체포하려는 자들이 우리가 있는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가 황제 폐하의 사면 교지를 받아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나는 시간이 너무 늦었으므로 그곳을 나와야 하였다. 택시를 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가 보겠습니다.”

내가 공원을 나오려는데 복장이 한국 여인의 복장이 아닌 키모노를 입은 여인이 귀신들이 밀고 끌고 가는 구루마 위에 앉아 있었다. 하체가 연기처럼 보였다. 손에 책을 펼쳐들고 있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이 서있었다.

요비妖妃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는 아름답고 지체가 높은 여자귀신이었다. 언제나 원한에 찬 문장이 있는 연서 안에 살다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만났다. 내가 자세히 보니 상당히 많은 수의 귀신들이 공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