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9일 오후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로 이동했다. 목단강시 사회과학원 인근 빈강공원(濱江公園)에 있는 팔녀투강(八女投江) 석조물을 보려는 것이다. 여성 8명이 강에 몸을 던졌다는 팔녀투강 석조물.
빈강공원에 들어서니 청춘 남녀뿐만 아니라 아이와 함께 나온 가족들이 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공원 한 쪽에는 음료수 회사에서 나와 경품을 내걸고 판촉 행사를 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토요일을 한가롭게 보내는 모습이 우리나라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팔녀투강 석조물 앞에 섰다. 거대한 석조물이라 기념비라기보다는 기념탑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했다.

▲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빈강공원에 있는 팔녀 투강 기념탑. 조선인 여성 2명을 포함한 8명의 여전사가 일본군과 싸우다 끝내 항복하지 않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잠시 묵념을 하고 팔녀투강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이 팔녀투강 기념탑은 한중 공동항일투쟁의 상징물이다. 1938년 10월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에는 끝내는 차디찬 우스훈하에 뛰어들어 장렬히 최후를 마친 8명의 여성 전사.
8명의 여전사는 제2로군 제5군 부녀대의 지도원 냉운(冷運)과 반장 호수지, 양귀진, 피복공장의 공장장 안순복(安順福), 그리고 전사 곽계금, 황계청, 왕혜민, 이봉선(李鳳善)이었다. 안순복과 이봉선이 조선인이다.
1938년 봄 일본 관동군은 송화강 하류에서 '3강대토벌'을 감행하였다. 당시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1사에는 30명으로 구성된 여성유격대원이 있었는데 8명의 여전사들이 바로 이 부대의 소속이었다. 그해 10월 유격부대는 목단강 하류에서 숙영을 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8명의 여전사는 본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강변쪽에 남아 일본군을 유인했다.
이들 덕분에 본대는 무사히 빠져 나갔으나 8명의 여전사는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우스훈하에 투강하여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총지휘였던 주보중 장군은 ‘팔녀투강’의 이야기듣고 ‘우스훈하강변 목단강가의 열녀’라는 제사를 남겼다. 중국은 ‘팔녀투강’을 제재로 한 영화 ‘중화의 아들딸’들을 제작했다.

▲ 목단강쪽에서 바라본 팔녀투강 기념탑. 조선인의 상징인 한복 저고리를 입고 있다.

목단강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1986년 9월7일 빈강공원광장에 팔녀투강 기념탑을 건립했다. 중앙미술원이 창작을 맡고 사천미술학원이 조각했다. 당시 전국정협부주석이었던 강극청이 '팔녀영령은 영생불멸하리라'는 제사를, 주은래 총리 부인인 등영초가 '8녀투강'이라는 기념비의 제사를 썼다. 기념탑을 지나니 글을 새긴 벽이 있다.  벽에는 목단강시인민정부가 1988년 8월1일 '팔영열녀명지'(八英烈女銘志)를 새겨 그들의 업적을 길이 기억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팔위여열사(八位女烈士) 명단과 함께 소속을 밝혀놓았는데, 안순복 열사와 이봉선 열사 아래에는 '조선족'임을 명토박았다.
▲ 벽에는 목단강시인민정부가 1988년 8월1일 '팔영열녀명지'(八英烈女銘志)를 새겨 그들의 업적을 길이 기억하도록 했다.

부상당한 동료를 안고 앞으로 이동하고 그 뒤에서 주변을 살피며 여전히 힘차게 손을 치켜들고 전진하는 여전사. 한복 저고리를 입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다.

팔녀투강에 대한 중국인들의 자부심과 경외심은 대단하고 중국의 항일투쟁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추앙받고 있다. 북경 노구교의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과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에도 팔녀투강 삽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