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기행 5일째인 7월 19일 연길에서 출발하여 왕청(汪靑)으로 향했다. 서일(徐一,  1881∼1921)  총재가 군사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십리평((十里坪), 덕원리를 답사한다.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  연변후대사랑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모임 이경호 회장이 우리를 환송해주었다. 이 회장은 연변과 교류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연변의 중고등학생들이 한국을 방문, 고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게 힘을 보태달라고 당부했다. 다들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중국의 농촌 풍경이 창밖으로 이어졌다. 밭이 많고 옥수수의 행렬이 이어졌다. 목이버섯 재배지도 자주 눈에 띄었다. 이렇게 재배한 목이버섯이 우리나라에서도 판매될 것이다. 한 시간 넘게 버스를 달려 십리평에 도착했다. 현재는 왕청현(汪靑縣) 동광진(東光鎭) 태평촌(太平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군사학교는 이 마을 뒤편 산기슭에 있다. 군사학교와 관련된 것이 전혀 없어 현지인들도 찾기 힘들다고 한다. 이곳을 수차례 답사한 임찬경 박사 덕분에 수월하게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앞에는 촌민들이 모여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마침 촌민들이 함께 출타하려는 날이어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촌민들이 버스를 타고 떠나자 마을 앞에서 우리를 반겨준 것은 동광진위생원이 광견병 예방을 알리는 포스터였다. 이 포스터를 보니 농촌에 왔다는 것을 실감나게 했다. 포스터를 통해 세계광견병의 날이 매년 9월 28일인 것도 처음 알았다.
마을 안 길을 통해 산기슭으로 올랐다. 7월 중순 한낮의 햇볕이 따가웠다. 이 따가운 햇볕은 1920년 무렵에도 여전했으리라.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로 망명한 서일(徐一)은 길림성 왕청현 덕원리에 중광단(重光團)을 창설하고 대한정의단으로 확대 개편한 뒤 1920년 왕청현 서대파에서 북로군정서를 창설하였다.

▲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가 있던 곳은 초지로 변해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었다.

임찬경 박사는 “1910~1911년 왕청지역에 대종교가 크게 발전해 교세가 대단했지요. 서일 총재가 이곳에서 중광단을 창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지요.”라고 설명했다.
이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왕청현 십리평에 세운 군사간부 양성학교로 김좌진이 소장이었다. 생도는 주로 대종교의 청년 신도와 왕청현 덕원리에 있는 명동학교 학생들이었다. 명동학교는 서일이 세웠다.
이 사관연성소가 있었던 십리평 산기슭은 연병장처럼 넓고 약간 비스듬한 평지였다. 군사훈련장으로 쓸 만한 곳이었다. 산기슭에 도착하니 사방이 온통 풀밭이었고 아무 흔적도 없었다.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었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졸업식을 거행하여 제1회 졸업생 289명을 배출하였다. 졸업생 대다수는 교성대(敎成隊)로 편성되어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백두산 일대로 이동하던 중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은 풀밭으로 변한 사관연성소 터에서 서일 총재, 북로군정서군, 청산리전투로 이어지는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다시 새겼다.
▲ 서일 총재가 사관연성소를 설치한 십리평은 연병장처럼 넓다. 앞 마을이 태평촌이다.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서일 총재는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겪고 마적의 습격으로 밀산 당벽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상해(上海)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은 1921년 12월6일자에 ‘독립군총재 서일 씨 자장(自戕)’이라는 기사로 서일 총재의 최후를 알렸다.
“흥기호 부근에서 군무를 정리하다가 9월28일 홍의적에게 포위되어 그 부하와 촌민이 참살되는 것을 보고 호천호지(呼天號地 : 몹시 슬퍼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땅을 침)하다가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대한독립군총재 전 군정서총재 서일 씨는 지난 9월 28일 밀산현 흥기호 한 촌가에서 부하 사졸과 촌민이 마적의 난에 참살되는 것을 보고 분연히 슬퍼하다가 마침내 자살하였다더라”
독립신문은 당시의 광경과 서일의 약력을 게재하고 “근자에 이르러 기고(旗鼓)를 다시 정비하여 일거에 왜적을 토멸한 대계를 유악하다가 불행히 이번의 기변을 만나 우리 앞길의 대업에 일대 손실을 입었으니 그 불행을 무엇에 비하리오.
서일은 키가 크고 얼굴이 온화하여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으며 진심을 다하고 근면하여 가히 대임을 담당할 만하였다”라고 하였다.
▲ 십리평 사관양성소 옛 터에서 답사단이 기념 촬영을 했다.

이날 독립신문에는 조사(弔辭)도 게재하였다. 지금의 문장으로 고쳐 읽는다.
“오호 통재라. 선생의 서거하심이여. 누구를 위하여 오늘의 일거(一擧)가 있었으며 누구를 위하여 오늘의 한 죽음이 있었는가. 선생의 일거는 과연 이천만 동포의 자유존영을 위하였으며 선생의 일사(一死)는 13의사와 수백 양민의 무고한 피해를 위함이시니 일거도 나라를 위하였고, 일사도 동포를 위함은 곧 선생의 고의(高義 : 높은 도덕과 의리)가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동포의 생명으로 곧 자신의 목숨으로 삼으시며 동포의 사생으로 곧 자신의 사생을 정하였으므로 그의 생도 무리를 따라 생하였고 그의 죽음도 또한 무리를 따라 사하였도다.
선생이여, 선생이 만일 나라를 회복하고 보필하는 자리에 있으셨다면 나라와 함께 고락을 함께하는 교목세신(喬木世臣 : 여러 대를 나라의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편안함과 근심걱정을 나라와 함께 하는 신하)의 자격이 선생이시며, 필부에게 은택이 미치지 못하면 마음속에 부끄럽기가 마치 저잣거리에서 매를 맞는 것과 같이 하는 천하를 맡길 만한 훌륭한 신하도 또한 선생이 실지라.
▲ 서일 총재의 서거 소식을 보도한 독립신문(상해 발행). <자료=독립기념관>

만리초보(萬里初步)의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바로 눈앞에 두시고 한번 죽음으로써 인(仁)을 이루시고 의를 취하심은 비록 선생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천년의 죽백(竹帛)에 기록되어 전할지라도 아직도 살아 있고 거적에서 방패를 베고 자며 백전 고투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만리장성이 무너졌으며 큰 건물의 대들보가 꺾어짐과 같도다. 하물며 청산리 전역에 개선가를 부르시던 소리 우리의 귀에 잊을 수 없는 경종이 됨 일런가.
밀산 송백이 만고장청함은 우리 선생의 절의를 띠어서고, 파저강물이 천추에 우는 것은 우리 선생의 유한을 울려 흐르나니 오호 송백이 끝이 없이 푸르고, 오호 강수야 한이 없이 울어라. 감지 못할 선생의 두 눈이 일월 같이 달려 보시나니라. 일재(一齎)”
▲ 서일 총재가 중광단을 창설한 길림성 왕청현 덕원리. 도로 공사 중이라 가까이 갈 수 없다.

십리평을 나와 덕원리로 이동하였다. 도로공사를 하여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마을에는 민가인듯 한 가옥이 한 채 있고 그 주변은 죄다 농토로 변하여 농작물이 햇빛을 받아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청산리 대첩이후 일제는 우리 동포 거주지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이곳도 휩쓸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픈 역사의 현장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