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8일 저녁 연변 재중동포와 교류회가 열렸다. 사단법인 연변후대사랑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모임(회장 이경호, 이하 후사모) 회원들과 만났다. 후사모는 연변대학 교수 등 여러 계층의 재중동포가 참여한다.
호텔 회의실이 교류회장이어서 중앙에 주요 인사 자리를 배치하고 양 옆으로 참가자 자리를 배열하다보니, 무슨 회담이나 논문발표를 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한 쪽 벽 화면에 비춘 발표 자료가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우대석 국학운동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사회로 교류회를 시작하면서 경직된 분위기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성민 국학운동시민연합 대표가 인사말을 한 후 한국에서 온 답사자들을 소개했다.
이어 이경호 후사모 회장이 환영사를 한 후 후사모 회원을 소개하고 후사모 활동 내용을 파워포인트 자료를 통해 소개했다. 이경호 회장은 ‘삼일신고’ 연구로 석사를 받았다. 2011년 설립된 후사모는 사람은 홍익인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연변 동포 학생들에게 한민족 전통문화를 알려주고 이웃돕기, 환경보호, 자원절약, 문화건설 활동을 한다.

▲ 연길에서 7월 18일 연변후대사랑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모임 회원들과 교류회를 열었다.

골수암 아이를 위해 모금활동을 하고 학생들의 심리상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 한국 대학생들과 중국에 있는 우리나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을 함께하고, 연변 학생 중 후사모 장학생을 선발하여 한국 견학을 지원한다. 조선족학교에 한복을 전달하고 예절 교육을 하여 한민족의 얼을 심어주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러한 후사모의 활동은 길림성TV 등에 보도되는 등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후사모 활동 소개에 이어 한국측에서 정길영 박사(경기국학운동시민연합 대표)가 ‘한민족의 정신과 서일의 항일투쟁’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정 박사는 “2011년 연변에 왔을 때 후사모의 활동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특히 후사모는 자원위기, 환경위기, 전쟁위기로부터 지구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참 가치관을 가진 후대를 길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어느 특정 지역, 민족, 국가를 초월하여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엔지오(NGO)로서 사람이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에는 후대를 위하여 살고, 봉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서두를 시작했다. 무거운 주제가 한결 가볍게 다가오는 듯했다.
정 박사는 한민족의 정체성, 서일(徐一) 독립군 총재의 대일항쟁과 구국정신을 소개했다. 정 박사는 “서일은 대일 무장투쟁을 선도하면 강력한 단군민족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를 만들어 청산리전역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며 그는 19세기말 평범한 삶을 살다가 20세기 초반 무너져 내리는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온 몸을 바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 총재였다”고 강조했다. 연변은 서일의 대일 무장투쟁 근거지였다. 정 박사는 서일의 구국 정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서일이 설계한 ‘단군민족정신’은 국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 한반도의 분단정세를 풀어 가는 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며, 세계에 흩어져 있는 700만 재외동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서일이 주장하였던 단군민족주의의 근간은 바로 ‘홍익인간’ 정신이다. 이 홍익인간 정신은 한민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인류에 적용되는 상생의 원리로서 인류평화의 정신인 것이다.”
정 박사는 서일이 위대한 족적을 남겼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서일이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요인은 연구가 미약했고, 관련 자료를 일본이 철저하게 없애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그의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였던 길림성, 흑룡강성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과 나아가 서일기념관 설립 사업이 추진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후대에 참 가치관을 심어주고 한민족의 정신인 홍익인간 문화를 선양하고 있는 후사모의 활동을 한국에서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면 한다.” 정 박사는 이렇게 발표를 마무리했다.
허명철 연변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정 박사 뒤를 이어 발표했다. 허 교수는 “‘페호’에서 ‘위탄’으로”라는 글을 준비했다가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 좀 당황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페호”는1996년 8월 남태평양에서 조선족 선원들이 주도한 한국 해운 사상 최악의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을 말한다. 이 반란으로 한국인 7명, 인도네시아인 3명, 조선족 1명이 목숨을 잃었고 국내와 연변조선족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위탄’은 MBC의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연변 출신 백청강이 이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한 것을 말한다.
▲ 우대석 국학운동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사회로 답사단과 후사모 양측에서 각각 주제 발표를 했다.

허 교수는 한국과 조선족의 교류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한국과 조선족의 만남은 6.25을 거쳐 전쟁의 트라우마가 생겼고 한국 인식은 중국 관영통신의 왜곡된 정보를 접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KBS 방송을 통한 간접 교류를 했다. 흘러간 테이프만 가지고 있어도 반가웠다. 1992년 한중 수교는 조선족사회 구성원에게 획기적인 해였다. 조선족 사회에 경제, 문화 등 영역에서 신속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며 조선족사회구성원들이 하루속히 가난에서 탈피하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자체 민족문화를 성찰하고 정립해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희망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택하면서 순수한 동족의식과 혈육의 정도 경제이익관계로부터 오는 현실적 충격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초청사기, 불법체류, 가짜 결혼, 밀입국ㅡ초기 교류 과정에서 나타난 이 같은 불신과 갈등은 양 사회 언론매체의 주요 메뉴가 되었고 초청사기 피해자들의 절규는 개별 한국인에 대한 저주로부터 한국사회에 대한 질타로 이어졌고 1996년에 발생한 “페스카마호” 선상살인 사건 또한 한국 사회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허 교수는 이 페스카마호 사건이 양 사회가 몇 년간 교류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 노무현 정부시절 중국 동포의 국적 취득 조건을 완화하는 등 2007년 방문취업제를 도입하여 중국 동포가 더욱 자유롭게 한국행을 할 수 있게 됐다. 2011년 백청강의 ‘위대한 탄생’ 우승은 중국 동포에게 큰 놀라움과 희망을 주었다.
“위대한 탄생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될 사람이 1등하는 것이 아니라 안될 것 같은 사람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변화되어 위대한 가수로 탄생하는 것을 뜻하듯이 한국에서 ‘코리안드림’의 상징이 된 백청강의 신드럼은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과거에 받은 상처를 치유한다면 진정 ‘코리안드림’의 완성된 작품을 그려낼 수 있다는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를 안겨주고 있다.”
허 교수는 국내에서 조선족을 ‘중국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중국 몽골족이라고 하지 않는데 왜 ‘중국 조선족’이라고 하여 국적을 따지느냐는 것이다.
“한민족이면 민족을 따지지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민족으로 만나서 대화가 가능하지만, 국적을 따지면 대화가 안 통한다. 민족간에 만남이지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족은 국적을 따지만 중국국민이고 민족으로는 한민족이다. 용어 사용에도 유의해야 한다.”
무심코 우리가 쓰는 말이 잘못 됐다는 걸 알게 되었다. 허 교수는 중국과 문제가 생겼을 때 조선족 탓을 하는 국내 언론보도를 거론했다.
▲ 연변후대사랑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모임을 지원하는 후원금을 이성민 국학운동시민연합 대표(오른쪽)가 전달하고 격려했다.

“중국은 조선족을 활용하는데 한국은 비난만 한다. 중국은 조선족을 활용하는데 한국은 왜 못하느냐? 이제는 조선족을 한국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허 교수는 예전에 서울대학교에서 2년간 생활한 적이 있어 국내에서 중국동포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잘 알았다. 그가 전하는 중국동포의 한국 생활은 내게도 아프게 들렸다. 중국에 여러 번 왔지만, 재중동포와 만나 허심탄회하게 한국과 재중동포 사회와의 관계를 이야기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재중동포가 보는 한국 사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민낯이었다. 연변에서 마주친 우리의 민낯에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허 교수는 “김태원과 백청강 이 두 멘토와 멘티의 합작,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성원이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꿈을 이뤄내는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하였다면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와의 ‘손에 손잡고’는 우리 민족 역사에 길이 남을 하나의 ‘위대한 탄생’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발표를 정리했다. 허 교수의 발표를 듣는 동안 중국 조선족 사회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이 상태로 간다면 조선족 사회를 한국이 안을 수 있을까?

발표가 끝나고 후사모에 후원금과 국내 도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호텔에서 공식 행사를 마쳤다. 이날 교류는 저녁 식사로 이어졌다. 후사모 회원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중국술로 건배를 하고 서로 권하며 서너 잔을 마시자 긴장이 풀어졌다. 후사모 회원들도 가볍게 생각하고 참석한 자리가 공식 회담장이나 논문 발표장 같아 당황했다고 했다. 공식 행사에서 나누지 못한 마음을 나누며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과 연변 조선족 사회가 더욱 가까워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