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9일 토요일 오후 길림성 왕청현 덕원리를 출발하여 발해 상경용천부를 향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오경 가운데 하나로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 있다. 용천부 외성(外城)을 지나 왕성으로 들어갔다. 외성이라지만, 지금 허물어진 성벽만 남아 옛 자취를 증명하고 있다. 내성인 황성은 평평한 지형에 쌓은 평지성이다. 상경성은 서쪽과 북쪽으로 휘감고 흐르는 목단강을 낀 너른 평원에 둘레 40리에 달하는 거대한 평지성이다.

조선시대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상경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의 영고탑성 서남쪽에 있다. ‘신당서’에 “천보(742~756) 말년에 대흠무가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구국(舊國)에서 곧바로 300리 되는 곳으로서 홀한하의 동쪽에 있다’하였다. 가탐은 ‘안동도호부로부터 동북쪽으로 과거의 개모성과 신성을 경유한 뒤에, 다시 말해 장령부를 경유하여 1,5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로 생각해보건대, 분명 영고탑 서남쪽에 있었고, 금나라 상경성과 가까웠을 것이다. ‘명일통지’에는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발해 상경에 도읍을 설치하였다” 고 하였으니, 바로 이곳이다.

▲ 발해 상경용천부 궁성으로 들어가는 문.

상경용천부 일대를 동경성(東京城)이라 하는데 이는 청(淸)나라 때부터 부른 명칭이다. 그러나 동경 용원부와 혼동하기 쉬워 지금은 상경성으로 고쳐 부른다.
오후 뜨거운 햇볕이 내리쪼였지만,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가 우거져 시원했다. 관광버스 수십 대가 동시에 주차할 만한 주차장을 갖추었다. 하지만 이날 상경용천부를 찾은 관광버스는 우리가 타고 온 버스뿐이었다.
중국정부는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고 이곳은 현재 ‘발해국 상경용천부 유지국가고고유지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안내문에는 발해 상경용천부를 당(唐)나라의 문화라고 소개하였다.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이야기다.

“발해국 상경용천부 터는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 있으며, 우리나라 성당(盛唐, 713~762년)기 가장 완비된 형태를 갖춘 건축유적이다. 유적이 풍부하고 고도(古都) 위치, 도시 구조, 건축양식, 건축기술, 건축예술에서 당나라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중요한 역사 문화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 기술로서 가치와 예술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용천부 궁성 안에는 5개의 궁지가 있다.

발해국이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나라로 발전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하였는데, 공원 설명문에는 그런 내용이 한 글자도 없다. 발해 상경용천부를 설명하는데 발해는 없고 당나라만 있다. 씁쓸하고 안타깝다.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우리 또한 발해의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용천부 안내문을 보며 ‘발해고’를 쓴 유득공, 그리고 단재 신채호가 떠올랐다.
유득공은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하였다. (유득공 ‘발해고’, 송기호 옮김, 홍익출판사, 2013. 개정판)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저술하지 않아서 우리나라가 압록 이서(以西)를 적국에 양도하기 시작했다고 통탄을 금지 못 했다.
▲ 제1 궁지인데 안내판에는 궁성일전지(宮城一殿址)이라고 하였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안내문을 보고 있는데 임찬경 박사가 도면을 하나 꺼내더니 독립운동가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일대에 안희제가 만든 발해농장이 있었고 국외 독립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임 박사가 보여준 것은 발해농장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기지 도면이었다. 발해의 옛 터에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자 일행은 다시 역사 공부에 심취했다. 전문가와 동행한 덕분이다.

▲ 독립운동가 안희제가 발해 상경성에 발해농장을 토대로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었다.

안희제는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1933년 중국으로 망명해 발해의 상경성에서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했다. 그는 남한지역에서 이주한 300여 명 가구를 정착시키고 자신이 고안한 '자작농창제'를 시행했다. 안희제는 농지개간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국외독립운동기지로 건설한 발해농장을 은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사업수완이 있던 안희제는 국내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국내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자금을 제공했다. 국내에 돌아와 이동언이 쓴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안희제'(독립기념관, 2010)을 통해 발해농장에 관련하여 자세히 읽었으니 망외의 소득이 있었다.    

안희제의 발해농장 독립운동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발길을  궁성으로 돌렸다. 일제가 발굴한 곳을 2006년에 중국은 단독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발굴, 정비하였다. 건물이 복원된 것이 아니라서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상경성 정문 일부 복원하였고 나머지는 지표만 정리하여 궁전지 임을 알렸다. 복원한 곳은 발해의 양식이 아니라 당나라 양식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남쪽으로 바로 보았다. 쭉 뻗은 도로-주작대로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돌을 쌓아 무대처럼 만들어 놓은 궁전지를 끝까지 가보고 왼쪽으로 돌아 나왔다. 전에는 이 성 안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는 데 지금은 정원을 만들어 놓아 수많은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십여 명이 이 꽃밭에서 꽃을 돌본다.
왕성 동문에 박물관에 들러 유물로 발해의 역사를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