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극단 모시는사람들’이 초연한 신작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작가·연출 김정숙)이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 성동구 성수아트홀에서 연일 호평 속에 공연되었다.

호평을 이끌어 낸 첫 번째 이유는 아마도 익숙한 고전 소설을 모티프로 한 점에 있을 것이다. 바로 고전 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홍길동의 모친 ‘춘섬’을 소환한 점이다. 주인공 홍길동은 모두 기억하지만, 그 어머니 ‘춘섬’이라면? 실제 ‘춘섬’은 《홍길동전》에서 몇 장면에 나오지 않는다. 용꿈을 꾼 홍 승상이 ‘춘섬’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 여덟 살이 된 길동이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어머니에게 와서 통곡하는 장면, 길동이 자객을 죽이고 길을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 대목, 홍 승상이 세상을 떠날 때, 그리고 길동을 따라 갈 때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춘섬’을 주인공으로 하여 극화한 <춘섬이의 거짓말>은 《홍길동전》에서 새롭게 희곡을 만들어내고 이를 연극으로 무대에 올림으로써 ‘문학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였다. 새삼 고전의 힘을 일깨워주었다.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이렇게 ‘춘섬’을 소환하여 창작한 희곡 ‘춘섬의 거짓말’의 뛰어난 작품성이 연극 <춘섬의 거짓말>의 호평에도 기여하였다. 희곡 ‘춘섬의 거짓말’은 탄탄한 줄거리에 치밀한 구성,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종의 신분이지만 ‘춘섬’은 숯 굽는 개불이와 연정을 나누고 임신을 한다. 이를 모르는 부모는 ‘춘섬’을 부잣집 양반에게 씨받이로 보내려 한다. 그러다 용꿈을 꾼 홍대감의 눈에 띈 ‘춘섬’은 사랑방에 불려 가고 홍대감의 첩이 된다. ‘춘섬’이 회임한 것이 드러나자 안방마님, 첩 초란 등은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내려 혈안이 된다. ‘춘섬’은 개불이의 거짓말, 늙은 처녀 쫑쫑이, 과부 딸끝네의 거짓말 덕분에 이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춘섬은 개불이의 아이를 홍대감의 아이로 낳기로 한다. 아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아이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런 줄거리의 희곡을 쓴 김정숙 작가는 1. 戀(연), 2. 孝女(효녀), 3. 月(월), 4. 落胎(낙태), 5. 南柯一夢(남가일몽), 6. 强姦(강간), 7. 개불이, 8. 嫉妬(질투), 9. 거짓말, 10. 火爐(화로)를 업다, 11. 離別(이별)로 구성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아마도 ‘12. 홍길동’ 염두에 둔 구성이 아닐까, 또한 ‘판소리 열두 마당’을 고려한 듯하기도 하다.

연극에서는 각 장면 제목이 드러나지 않지만, ‘희곡’에서 전체 구성을 살펴보자. 1. 戀(연)에서는 개불이와 춘섬이 사랑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사람이 매파다. 이는 매파가 개불이와 춘섬이의 앞으로 삶에 깊이 개입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좋은 쪽일까, 나쁜 쪽일까? 개불이는 내년 봄에 혼례를 올리자고 한다. 하지만 종 신분인 춘섬이는 주인댁이 허락해야 혼례를 올릴 수 있다. 사랑하는 것은 자유지만, 혼례는 자유롭지 않다. 과연 이들은 순조롭게 혼례를 올릴까?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2. 孝女(효녀)’에서 춘섬이 부모는 일방적으로 춘섬이를 씨받이로 보내는 것을 매파와 의논한다. 씨받이 보낸 대가로 받은 돈으로 노비문서를 사고 홍 승상 아들 대신 군역에 간 춘섬이 오래비를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이에 춘섬이는 소심하게 어머니에게 “씨받이 꼭 가야 하나?” 반항해 보지만, 어머니는 “종년 팔자에 시집이나 씨받이나 다 똑같어”라며 무시한다. 개불이와 혼례를 꿈꾸는 춘섬이에게 이렇게 시련이 닥친다. 이 대목은 종으로 사는 신분이 얼마나 어렵고 고되고 양반에 시달리는지를 보여준다. 또 어머니의 얼굴을 지진 인두 자국을 통해 양반에게서 종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을 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3. 月(월)’에서는 씨받이로 가기로 한 춘섬이 개불이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아는 장면이다. 이로써 씨받이도 못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4. 落胎(낙태)’에서는 개불이와 춘섬이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선달과 관기 순향의 이별 장면이 펼쳐진다. 선달은 밤낮으로 끼고 놀았던 관기 순향이 임신한 것을 알고 몰래 떠나려 하고, 이를 알고 뒤쫓아온 순향은 뱃속의 아이를 선달의 아이로 인정해 달라고 사정한다. 하지만 선달은 이를 거부하고 끝내는 아이를 지우라고 한다. 이에 순향은 아이를 지우려고 바위에서 굴러내린다. 이를 본 춘섬이 말린다. 이 장면은 양반들이 여성을 쾌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어도 사회적 체면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고, 경제적으로 지원을 할 수 없는 나약한 양반. 이는 앞서 매파가 춘섬 부모에게 씨받이로 가는 대신 많은 재물을 준다고 말하지만, 과연 실제로 받을 수 있을지 의심하게 한다. 아이를 지우려는 순향을 말리는 춘섬에게서 어느새 모성애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南柯一夢(남가일몽)’은 홍 대감이 낮에 용꿈을 꾸고 부인과 동침하고자 하나 부인의 거부로 무산되자 ‘춘섬’을 사랑으로 불러들이는 장면이다. 앞에서 선달은 여성을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대감은 자녀를 얻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대감은 본처 앞에서도 춘섬을 사랑으로 불러들이지만, 이러한 홍 대감의 행동을 부인은 전혀 막지 못한다. 이 어디에도 진정한 사랑이 없다. 앞에서 개불이와 춘섬이 나누는 진정한 사랑과 대조된다.

‘6. 强姦(강간)’에서는 ‘춘섬’이 사랑에 들어간 이후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제일 먼저 달려온 초란은 발을 동동 구르고, 춘섬 모는 말을 하지 못하는데, 매파가 말이 많다. 씨받이로 보내면 받을 돈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7. 개불이’는 마님의 명령으로 ‘개불이’를 잡아가는 장면으로 기승전결의 전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죄 없는 이들을 마음대로 잡아들이는 양반들의 횡포를 볼 수 있다.

‘8. 嫉妬(질투)’는 춘섬이 뱃속의 아이, 진짜 아버지를 찾는 재판 장면이다. 초란과 매파가 원고가 되어 개불이가 춘섬이와 붙어먹었다고 주장하자 개불이는 죽어도 모르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에 매파는 백중날 밤 너럭바위위에서 둘이 안고 뒹구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다. 공방이 가열되자 늙은 처녀 쫑쫑이가 나서 말한다. 백중날 너럭바위에 있었지만, 춘섬이는 보지 못했다고. 매파가 비웃으며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쫑쫑이는 이치에 맞게 설명하여 매파의 말문을 막는다. 더하여 딸끝네도 나서서 백중날 너럭바위에 갔다고 거짓말을 한다. 두 사람이 춘섬이를 보지 못했다고 하니 매파는 더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침침하여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실토한다. 이렇게 마님 몸종 쫑쫑이, 딸끝네가 이룬 작은 연대가 춘섬이와 개불이를 구한다.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9. 거짓말’은 별당에 머물게 된 춘섬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춘섬이 개불이를 따라 도망가면 죽게 되니 도망 가면 안 된다. 남은 건 대감의 첩으로 사는 것. 또 하나는 스스로 죽는 것. ‘춘섬’은 대감의 첩으로 살기로 한다. 개불이의 아이를 양반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자신만 말하지 않으면 뱃속의 아이가 개불이의 아이인지 아무도 모른다. ‘춘섬’은 여기서 자신의 가진 힘을 깨닫는다. 자신은 종의 신분이지만, 내 아이는 “양반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힘! 그리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서는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더욱더 뱃속 아이가 대감의 아이가 되어야 한다. “이눔의 양반 세상에 살라믄 반양반이라도 되어야 해. 나는 인저 입을 꿰매 붙이고 살 거야. 죄는 내가 받으면 되지. 평생 거짓말쟁이로 살 거여.” 이렇듯 춘섬이가 하는 거짓말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거짓말이다.

‘10. 火爐(화로)를 업다’에서는 춘섬 어머니가 한사코 말하지 않으려 한 얼굴에 낸 인두자국의 비밀을 춘섬이가 깨닫는 대목이다. 춘섬이 엄마가 왜 얼굴에 인두질을 했는지 알겠다고 하자 춘섬 모는 ‘애가 뭐소리여’하고 더는 말하지 않는다. 이어 춘섬은 화로를 안고 넘어져 다리에 별건 숯이 뛴다. 그리고 말한다. “어무니, 인저 대감님이 나를 안 찾것지?” 춘섬 어머니도 대감이 자신을 찾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얼굴을 인두로 지졌던 것이다. 이것을 알기에 춘섬 부는 남들이 뭐라고 해도 “그 인두질 덕분에 내 차지가 되었지”라고 말한다.

춘섬이 다리에 숯불을 놓은 것은 더는 도망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춘섬이의 거짓말' 공연 장면. 제공 극단 모시는사람들

‘11. 離別(이별)’은 몰래 만난 개불이와 춘섬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헤어지는 장면이다. 개불이는 자신은 “양반 둥지에 알 낳고 도망치는 뻐꾹새”라고 말한다. 이는 춘섬이에게 다른 생각하지 말고 대감 댁에 살면서 아이를 낳아 잘 키우라는 당부로 들린다. 양반들 때려잡는 도적이 되려고 활빈당으로 가는 개불이를 향해 춘섬이 “뻐꾹뻐꾹” 외치는 것은 당부대로 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개불이와 춘섬이 만나던 백중날 밤, 뻐꾹새가 괜히 울었던 것이 아니다.
개불이 떠난 후 춘섬은 어머니로 다시 태어난다.
“너는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팔자를 바꿨으니 장차 태어나믄 세상 팔자를 뒤집어엎어 불라냐? 무엇이 되었든 네 세상을 지어 살아라.
이제 나는 종년도 첩년도 아니여, 네 어머니로 살 거야, 내가 짓는 이 세상, 내 이름은 네 어머니여~!”

이렇게 춘섬이가 지은 거짓말에는 한 아이를 위한 결단,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어머니의 시선이 숨어 있다.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의 등장인물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 열여덟 소녀에서 여러 위기를 겪으며 어머니가 된 춘섬, 사랑하는 춘섬을 보호하고자 두 번이나 춘섬과 만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고 대감의 첩이 된 춘섬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떠나가 활빈당이 되는 개불이, 춘섬이 겪는 고초를 지켜보며 애끓는 춘섬 어머니, 양반가의 마님으로 체통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는 안방마님, 이익이 된다면 누구에게라도 달라붙고 음모를 꾸며내는 매파, 오랫동안 대감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지만 그렇지 못 한데 엉뚱하게도 춘섬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질투하는 초란 등 각자의 역할이 명확하다.

이러한 등장인물들 역을 맡은 배우들은 실제 그 인물이 된 듯 실감나게 연기를 펼쳐 관객들을 극에 빠져들게 했다. 대사를 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몸짓 하나하나가 세밀하여 보는 재미를 배가하였다. 일례로 춘섬 집을 찾은 매파가 먹다가 남은 감자를 다 챙겨 가지고 가는 장면은 매파의 탐욕스러운 성격을 드러낸다. 그래서 매파가 나중에 초란과 한패가 되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여도 관객은 매파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뛰어난 희곡을 배우들이 뛰어 난 연기로 극화한 명작 연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풀과 억새로 둘러싸인 자연 무대,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되는 너럭바위 등 끊임없이 배경영상을 통해 무대에 변화를 주어 극에 완전히 몰입하게 하였다. 여기에 계절과 정서를 이끄는 조명과 음악, 그리고 예술적인 의상까지 더해져 연극 무대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은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을 보았다면 김정숙 네 번째 희곡집 《조선여자전》에서 희곡 ‘춘섬이의 거짓말’과 소설 《홍길동전》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연극의 각 장면이 더욱 생생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