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작. 연출 김정숙 극단 모시는사람들 대표. 사진 극단 모시는 사람들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작. 연출 김정숙 극단 모시는사람들 대표. 사진 극단 모시는 사람들

조선 시대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새롭게 바라보는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 ‘홍길동의 어머니’ 춘섬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극단 모시는사람들(대표 김정숙)의 2025년 신작 〈춘섬이의 거짓말〉은 “생명을 품는 어머니의 존엄”을 다시 묻는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김정숙 대표는 “아이를 살리는 어머니의 결단이야말로 이 시대가 가장 절실히 돌아보아야 할 이야기”라 말한다. 1997년 〈블루사이공〉으로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2003년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으로 동아연극상 작가상을 수상한 김 대표는 무엇보다 생명과 사람이 먼저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해왔다. 〈숙영낭자전을 읽다〉, 〈심청전을 짓다〉, 〈소녀〉,〈꽃가마〉에 이어지는 조선여자전 다섯 번째 이야기 〈춘섬이의 거짓말〉 개막을 앞두고, 김정숙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 홍길동의 어머니 '춘섬'이를 소환한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번 신작〈춘섬이의 거짓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홍길동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홍길동이라는 세상을 바꾼 의적을 길러낸 힘은 어머니에게서 왔을 텐데, 홍길동의 어머니 춘섬이라는 인물은 소설 전체에서 단 몇 장면에만 등장해요. 홍판서의 시비였다는 것과, 홍길동이 집을 떠날 때 어머니에게 절을 올리는 장면, 그리고 율도국을 세운 홍길동이 춘섬이를 대왕대비로 모셔 온다는 내용이 전부죠.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태어나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게 되기까지, 춘섬이에겐 어떤 삶과 결단이 있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춘섬이의 거짓말〉은 홍길동전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지요.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 - 제목에서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거짓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춘섬이의 ‘거짓말’은 누구를 속이려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 짓는 이야기이지요. 작품 속에서 모든 인물이 이야기 짓습니다. 춘섬이만이 아니라 춘섬의 부모, 개불이, 쫑쫑이, 딸끝네……, 마님과 홍대감까지. 모두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에요. 생존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 거짓말을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거짓말의 표면 아래, 그 인물들이 진짜로 숨기고 있는 내적 진실에 주목합니다. 그들의 상처, 욕망, 절박함 말이지요. 춘섬이의 거짓말은 누구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 제 아이를 살리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선택입니다. 저는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했어요.

김정숙 대표의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연습 지도. 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김정숙 대표의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연습 지도. 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 - <춘섬이의 거짓말>에서 남녀의 사랑놀음이 공공연하게 드러납니다. 첫 대목 ‘1. 戀(연)’에서는 백중 달밤에 남녀의 사랑놀음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중간 대목 ‘6. 강간’에서 홍대감은 여러 사람이, 심지어 부인이 있는 데서 춘섬이를 안방으로 불러들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할까요?

백중 달밤에 남녀의 사랑놀음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실제의 사랑놀음이 무대에 펼쳐지는 것은 아니고 달밤의 사랑이란 생명의 자연스러우며 행복한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어요. 실제 무대 표현으로는 갈대밭에서 나는 교성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서 ‘지켜본다’의 의미는 스토커라기 보다는 달님이 보듯이 또는 밤새가 보듯이 서로 보고 보여지는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설정된 부분입니다. 극중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 청춘남녀의 설레는 연애 장면은 관객에게 생명의 가장 즐겁고 행복한 사랑으로 보이게 하려 노력입니다.

반면 홍대감이 춘섬이를 강간하는 장면은 실제 보여지는 장면은 아니며 조선시대라고 하는 계급 차별의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1장의 자연스럽고 행복한 남녀의 사랑이 권력과 폭력에 무너지는 여종의 불행을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 -  극중 ‘4. 낙태’에서는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지 않는 선달과 선달의 아이로 인정받으려는 순향의 갈등을 다룹니다. 춘섬과는 별개의 전개처럼 보이는데, 조선시대의 불합리하고 건강하지 못한 남녀관계가 낳은 비극처럼 생각됩니다. 또한 준비 없는 임신,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하지 않은 결과, 낙태를 하게 된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별개라고 보시는 것에 대해 저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현재까지의 의도는 춘섬이라는 18세 소녀가 만들어가는 삶에서 순향이라는 여성을 봄으로써 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실제적인 갈등을 배우게 되는 장면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춘섬이 어머니의 얼굴에 난 인두질당했다는 상처에 이어 춘섬이를 돕는 늙은 처녀 쫑쫑이나 과부 딸끝이네, 수태를 하지 못해 두려운 기생 초란이 등등 춘섬이 살아가야 할 조선 땅과 여성 삶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장면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대표 권력인 양반- 그 삶의 이면과 의도치 않은 임신이 주는 신체적 경제적 고통을 겪는 여성의 모습 등이 춘섬의 향후 선택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김정숙 대표의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연습 지도. 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김정숙 대표의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연습 지도. 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 - 지금, 여기 우리가 조선시대 춘섬이 이야기가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에 '종'이라는 신분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죠. 

춘섬이의 거짓말은 조선시대가 배경이죠. 대대로 종살이하는 씨종이라는 신분, 여자로 태어나 겪는 차별, 효녀, 열녀 같은 서사……, 그러나 이건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이야기예요. 현대인은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정작 자기 목소리를 잃고, 타인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춘섬이가 ‘이제부터 나는 내 이야기를 짓겠다’고 선언하는 순간은, 관객에게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다시 쥐라는 강한 메시지가 됩니다. AI에게 길을 묻는 시대에, 사람의 길은 결국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걸 춘섬이를 통해 보게 됩니다.

《홍길동전》에 서너줄 나오는 춘섬을 모셔서 그의 거짓말을 듣는 연극을 생각한 것은 기계에 길을 묻는 세상이 되고 보니 점점 자신의 삶을 짓는 것에 무심해지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내 이야기를 만들고 삶의 의미를 찾아 인생을 짓는 춘섬이의 모습이 연극을 보는 분들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작품은 춘섬이와 엄마가 마주 보고 웃고, 이어 쫑쫑이가 들어와 따라 웃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렇게 웃을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우리나라 저출산 문제를 다룬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젊은 사람들이 어머니가 불행해 보였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다고도 하고요. 그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습니다. 산후우울증이니, 독박육아니 이런 것도 힘들지만, 결국은 어머니의 존엄, 어머니의 기쁨이 사라진 탓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이 연극을 통해, 고통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기로 선택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이겨내려는 결심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춘섬이는 아이의 운명을 고민하고, 스스로 ‘어머니’라는 존재로 태어나며 그 존엄을 되찾아갑니다. ‘어머니로서의 생각하는 힘’이야말로 이 위태로운 시대를 건너는 가장 깊은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 - 이 작품을 보고 청소년 관객은 무엇을 느끼기를 바라시나요?

〈춘섬이의 거짓말〉은 고전을 바탕으로 하지만,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의 고민에도 닿아 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어려운 시대, 누구의 아이로 태어났고 어떤 조건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현실은 조선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보여져요. 청소년 관객이 춘섬이의 눈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바라보고, 자신의 선택과 삶의 주도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전을 만나는 일은 결국 ‘나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일이니까요. 무대 위의 인물들을 보며 ‘내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싶나’,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 - 1989년 창단된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대표이며 극작가와 연출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현역으로서 보시기에,  여전히 연극이 지금 이 시대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은 AI가 이야기를 대신 쓰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이야기는 사람의 말로, 몸으로, 눈빛으로 전해야 합니다. 연극은 누군가의 기쁨과 고통을 내 이야기로 끌어안고, 그 마음을 함께 바라보는 예술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그 감정을 한자리에서 함께 느끼는 경험입니다. 〈춘섬이의 거짓말〉을 통해서 관객이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시 희망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연출가로서 이 작품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요?

연극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관객과 함께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도구이길 바랍니다. ‘사람다움’과 ‘생각의 힘’을 돌아보며, AI가 아닌 스스로가 주도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힘과 용기를 〈춘섬이의 거짓말〉에서 얻어가길 바랍니다.

 

'춘섬이의 거짓말' 포스터. 이미지 극단 모시는사람들
'춘섬이의 거짓말' 포스터. 이미지 극단 모시는사람들

 

 

한편 김정숙 작·연출의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은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성수아트홀에서 공연된다. 공연 시간은 금요일 오후 7시 30분, 토·일요일 오후 2시, 5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