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을 복원하여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윤내현 전 단국대학교 교수가 6월 29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1939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난 고 윤내현 교수는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했다. 귀국하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부총장·대학원장 등을 지냈으며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단군학회 회장,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등을 역임했다.
고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에 대한 연구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고조선을 복원하여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80년대에 하버드대학에 갔다가 고조선 관련 중국과 북한의 방대한 자료를 접한 것이 연구의 계기가 되었다. 고조선이라는 고대의 제국이 실존했음을 증언하는 문헌 사료를 펼쳐보고 전율한 고인은 중국과 러시아, 북한의 자료를 토대로 한민족 최초의 고대 국가의 존재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증명하는 대대적인 연구, 집필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물을 집대성한 책이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불후의 명저로 일컬어지는 《고조선 연구》였다. 1990년대에 출간되어 고대사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하던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과 고대사 학계에서 격렬한 논란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2015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편집하여 개정판 《고조선 연구(상·하)》(만권당) 두 권으로 출간되었다.
고인은 고대사 연구의 두 번째 역작으로 《한국 열국사 연구》를 펴냈다. 열국시대는 고조선의 멸망 후부터 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개막까지, 시기적으로는 서기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 600여 년 동안을 가리킨다. 2,000년 이상 군림하던 고조선의 붕괴로 무주공산이 된 만주와 한반도 땅에서 수많은 거수국들이 역사의 주인을 자처하며 치열하게 자웅을 겨루었던 역동적인 시기인 것이다.
그 시기에 건립되고 스러져간 수많은 나라 가운데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하는 나라는 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국, 대방국, 한(삼한), 신라, 백제, 가야 등 몇 십 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땅에 존재했음은 사료가 증명하며, 다만 우리가 소홀히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국 열국사 연구》는 그 잊혀졌던 시대, 잊혀졌던 사건을 묵향 가득한 사료를 통해 우리 앞으로 소환한다.
《한국 열국사 연구》는 한국 고대사의 체계를 바로잡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 윤내현 교수는 발간 당시 머리말에서 “뼈대가 바르게 되어 있어야 신체가 바로 서듯이, 역사도 체계가 올바르게 잡혀 있어야 바르게 서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간행으로 고조선과 열국시대의 체계가 바로잡히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2026년 개정판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가 나왔다.
《한국 고대사 신론》은 고인의 고대사 연구 세 번째 역작으로 《고조선 연구》, 《한국 열국사 연구》에 이은 고대사 완결판이다. 이 책은 1986년 초판 출간으로부터 31년 만이 2017년 만권당에서 개정판이 출간됐다. 《한국 고대사 신론》은 한국 고대사에 관한 새롭고도 신선한 관점과 자료를 제시하여 고대사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왔던 6편의 논문을 모은 것이다.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 고조선의 도읍 천이고 / 고조선의 사회성격 / 기자신고 / 위만조선의 재인식 / 한사군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이라는 각 장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서 도읍과 사회성격을 밝히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대한 기존의 오해와 비밀을 풀며 ‘낙랑’을 둘러싼 논란까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동안 외면당했던 우리 고대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지평을 넓히는 동시에 뒤틀린 고대사로 국민을 기만한 역사학자들에 대한 냉철한 반성을 촉구하는 책이기도 하다.
《한국 고대사》는 고인이 학자로서 평생 공부했던 정수를 한 권에 요약한 책이다. 1천여 쪽이 훌쩍 넘는 《고조선 연구(상·하)》와 900여 쪽에 가까운 《한국 열국사 연구》의 방대한 내용이 불과 250여 쪽의 분량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학계의 통설을 뒤엎고 민족사관을 정립한 고 윤내현 교수는 서양 역사의 틀과 기준에 맞추어 동아시아의 역사를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사료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고증 끝에 새로운 한국사를 정립해낸다. 그 일환으로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시대 분류와는 다른 시대 구분을 정의하였다. 한국 고대사에 관한 새롭고도 신선한 관점을 제시해 한국 고대사를 국가이전시대, 고조선시대, 열국시대로 나누어 쉽게 풀어썼다. 지금까지 서양 역사의 틀에 맞추어 사용하던 원시시대, 선사시대,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등의 용어를 우리의 역사에 맞게 재정의한 것이다.
고인은 3부작 외에도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중국의 원시시대》 《상주사商周史》, 《중국사》(전 3권)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러한 연구와 저술로 ‘오늘의 책’상, 일석학술상, 금호학술상, 국무총리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김정오, 아들 윤장원, 윤진원.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장례식장. 발인은 7월 2일 오전 7시. 화장 서울추무공원(9시 10분). 장지는 천안공원묘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