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용 상

정치학 박사

 

 

“또 그 소리여…”

선거 유세차가 마을을 지나자, 길가에 서 있던 한 노인이 한숨 섞인 혼잣말을 내뱉는다. “여당은 밤낮 방탄이나 탄핵, 이재명의 형수 욕설이니 김부선 얘기고, 야당은 윤석열이 내란, 정치검찰, 사법부의 정치 개입 운운하는 소리만 하니… 그렇게도 할 말이 없는가. 이젠 지겨워 죽겠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이 짧은 탄식에 오늘날 우리 정치를 향한 국민의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하고, 갈등과 피로만 안겨주는 현실 속에서 이번 대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실망스럽다. 정책은 자취를 감추고, 날선 비방만 오간다. 선거판은 민생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상대 헐뜯기 경연장으로 전락했다.

지금 대선 후보들의 발언을 들어보면 ‘누가 더 위험한가’, ‘누가 더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가’에만 몰두한 ‘상대 과거 파헤치기 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기껏 정책이랍시고 발표되는 것들도 “무엇을 하겠다”는 선언만 있을 뿐,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없다.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어떤 법과 제도를 어떻게 손보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현실을 외면한 정책, 책임 없는 공약

예컨대 “군인 월급을 대폭 인상하겠다”, “주4일 근무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은 언뜻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경제 전반에 미칠 파장, 재정의 지속 가능성, 기업의 부담 변화에 대한 논의는 없다. 표를 의식한 단편적 공약일 뿐, 국가의 장래를 위한 고민은 빠져 있다. 남미 국가들이 자원이 풍부했음에도 포퓰리즘 정책으로 경제를 파탄낸 사례는 잘 알려져 있다. 당선만을 목표로 혹세무민하던 정치인들이 나라를 어떻게 망쳤는지를 한국 정치인들은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우리도 한번 망해보자는 속셈인가 싶을 정도로 현실 감각이 결여된 공약이 넘쳐난다.

정당은 민주주의의 핵심 기둥이다. 정당이란 단순히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국가 운영을 책임질 사람을 국민 앞에 세우는 조직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정당은 그 책무를 완전히 방기하고 있다.

민주당은 도덕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후보들을 감싸고, 국민의힘은 ‘반이재명’이라는 산술적 논리만 앞세워 정체성도 철학도 없는 단일화만을 추구한다. 정당들이 오직 ‘대통령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에만 집착할 뿐, 국민에 대한 고민은 0.1%도 없어 보인다. 이런 정당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겨도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의 책임도 크다 

정치가 이토록 천박해진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언론은 후보들 간의 싸움을 중계하듯 보도하면서 정책보다는 말싸움, 논쟁보다는 자극적인 장면만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만약 언론이 진짜 국민을 위한 언론이라면, 정당이 서로 싸움을 하되 정책에 관한 싸움을 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후보가 더 많은 실수를 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후보가 국가를 위해 더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비전을 제시했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언론이 먼저 수준 높은 정책 검증을 이끌어야 정치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처럼 유튜브의 선정적 클립만 따라다니는 보도 방식으로는 국민이 정책을 이해하고 판단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정치를 싸움으로만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를 이제는 멈춰야 한다.

위기 시대에 대한 무감각

지금 우리는 국내 정치의 혼란과 동시에 국제 질서의 대전환기에 놓여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손을 맞잡았고, 북한은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실험장을 바라보며 불안 속에 하루를 시작한다.

반면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은 트럼프 재등장으로 외교 기조가 불확실해지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 동맹에 대한 부담 전가, 자국 이익에 따른 정책 전환은 곧 한국의 안보·경제적 고립을 의미할 수 있다.

이처럼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시점에서, 한국의 대선은 미래에 대한 설계도 없이 과거만을 논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북한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바로 우리의 정치일지도 모른다.

정당은 이제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후보자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과 책임 있는 공천은 정당의 기본 책무다. 국민 또한 ‘덜 나쁜 사람’ 고르기에 익숙해져선 안 된다. 정치는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권자 스스로가 먼저 기준과 책임의 눈으로 정치인을 판단해야 한다. 언론이 만든 이미지에 휘둘리지 말고, 정책의 실현 가능성과 국가 운영 능력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치는 결국 우리 삶의 문제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은 증오와 갈등의 정치가 지배하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상식과 책임의 정치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정당과 후보자들은 지금 이 순간도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국민이 없고 오직 자리를 차지하는 계산만 있다면, 그들은 국가의 리더가 아니라 탐욕스러운 권력 사냥꾼에 불과하다.

정치권은 더 이상 국민을 무지한 존재로 착각하지 말라. 국민은 정치인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표로 심판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후보가 과연 대한민국을 책임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당당히 답하지 못하는 후보는 누구든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