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진 작가의 드로잉 연작은 고정된 형태를 지우고, 감각의 얼룩과 흔적을 따라 회화의 본질을 탐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번짐과 스며듦, 뭉침 같은 유기적 조형 요소가 유동적으로 흐른다. 수채 물감의 젖음과 번짐 위에 파스텔이 덧입혀지며, 하나의 얼룩처럼 퍼지고 수렴되는 색면들이 리듬감 있는 화면을 완성한다.
일정한 형태를 재현하기보다 감각이 지나간 자리를 기록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드로잉을 단순히 회화 작업을 위한 밑그림이 아닌, 조형적 파동의 현장으로 이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선의 흐름과 색의 중첩은 순간의 감정과 우연을 반영하며, 관객의 시선을 자유롭게 유도한다.

서울 갤러리 호호에서 5월 9일부터 열리는 김태진 작가 개인전 《시그널(Signal)》에서는 작가의 드로잉 작품을 볼 수 있다. 열네 번째 개인전으로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은 드로잉 신작 20여 점으로 구성되며, 작가의 회화적 역량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김태진 작가는 이번 작업을 통해 “드로잉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과정”이라며 “명확한 이미지를 상정하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면 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감각적 사건들을 지켜보는 태도에 가깝다. 물감이 번지거나 스며드는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나도 그 안에서 흔적을 추적(tracking)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화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렁임과 스며듦, 주저함의 감각을 통해 그는 삶 속 불확실성을 물질의 언어로 환원한다.

그간 영상, 설치, 뉴미디어 기반의 작업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의 확장된 매체를 다뤄온 김태진 작가에게 이번 드로잉 전시는 새로운 전환점. 수채와 파스텔이라는 물성 중심의 매체로 돌아온 그는, 직접적인 손의 감각을 통해 회화의 물질성과 시간성을 실험하는 데 몰두했다.
전시 제목 ‘시그널(Signal)’은 일반적으로 ‘어떤 의사를 전달하거나 지시하기 위해 일정한 방법으로 보내는 표시나 기호’ 혹은 ‘어떤 일이 일어날 조짐이나 징후’를 뜻하지만, 단일한 의미로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감상자 각자의 인식과 감정에 따라 다채롭게 반응하는 열린 회화 언어로 기능한다. 생성과 소멸, 파동과 흐름이 공존하는 화면은 감각의 프리즘을 통과한 일종의 ‘징후’이며, 동시에 관객에게 던지는 ‘신호’다.
우리 삶에서 주어진 시간은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향해 조용히 흘러간다. 때로는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막연한 상태로 머무는 시간이 있다. 김태진 작가의 이번 드로잉 연작은 바로 그러한 ‘알 수 없음’의 감각을 품고 있다.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는 색과 선, 번짐과 스며듦이 충돌하면서도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품은, 감각의 리듬과 내면의 파동을 따라 관객과 마주할 준비를 마쳤다. 통제와 우연 사이에서 생성된 흔적들은 고정된 구조를 거부하며, 비형식적 회화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김태진 작가는 이번 작업을 통해 다시 손으로, 다시 감각으로, 다시 회화로 돌아와 ‘보이는 것 너머’를 감지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미지의 조형 가능성을 향해 던진 그의 과감한 시도는,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리듬과 감정에 대한 감각적 사유이자 그 흔적이다.
김태진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 사단법인 한국영상학회 회장.
김태진 작가 개인전 《시그널(Signal)》은 5월 31일까지 서울 연희동 갤러리 호호(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연길 72, 2층)에서 열린다. 관람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