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이 망하면서 한민족은 분열하고 중국은 진(秦), 한(漢)으로 통일국가를 이루면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이 바뀌게 되고 사상이 미치는 영향력도 바뀌게 됩니다.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의 추가 단군조선이 우위에 있을 때는 단군조선이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으로 불리면서 우리의 선도사상인 순수한 본래의 천성을 회복하는 '복본(複本)' 사상과 홍익인간 사상이 중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성선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이 망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우리의 선도사상이 약해짐에 따라 거꾸로 중국으로부터 외래사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인(仁)과 성선설에 기반한 왕도정치를 주장하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사상보다 법치(法治)와 성악설(性惡說)에 기반한 부국강병의 패도정치를 주장하는 순자(荀子)의 제자인 한비(韓非)의 법가 사상이 득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비(韓非)의 법가사상은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법가에 근거한 가혹한 통치가 시황제 사후 진나라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진나라가 멸망하고 세워진 한(漢)나라는 ‘냉혹한 법가’ 대신에 ‘부드러운 유가 사상을 통치의 근간으로 앞세웠으나 양두구육(羊頭狗肉)처럼 안은 법가사상인데 겉을 유가 사상으로 포장했습니다.

이미 철기 시대를 맞이하여 물질생산이 늘고 욕망이 커져서 양심보다는 욕심이 우위를 차지한 사회가 되었기에 인(仁)과 양심에 기반한 유가 사상이 통치의 근간이 되지 못하고 겉은 유가이고 속 안은 법(法)과 욕망에 기반한 법가사상인 짝퉁 유가 사상이 통치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漢)나라 무제 때 동중서(董仲舒)는 법가와 유가를 융합한 이른바 삼강오상(三綱五常)이라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통치 이론’을 구성합니다. 법가의 효율성과 유가의 지속성을 결합하고자 한 것입니다. 삼강사상은 법가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오상(五常)은 유가의 오륜(五倫)에서 가져왔습니다.

삼강(三綱)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군신・부자・부부를 다루는데 각각의 관계는 상호적이 아니라 상하 차등적이요, 쌍방적이 아니라 일방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요컨대 군주·아비·남편이 벼릿줄(주인)이고, 그 상대인 신민·자식·아내는 그 물눈(종)입니다. 그리고 이 주종 관계가 불변하다는 논리입니다.

유가(儒家)에서는 군신과 부자와 부부관계를 수평관계로 보는데 동중서는 법가사상을 접목하여 군신과 부자와 부부관계를 수직적 상하관계로 바꿔놓았습니다. 유가(儒家)의 오륜(五倫)이 상호 평등 관계에 기초한 것임에 비해, 삼강(三綱)은 수직적 차별구조를 정당화합니다.

따라서 동중서의 삼강오상(三綱五常)에서 나온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알려진 유학은 공자, 맹자의 유학과 다른 충(忠)과 효(孝),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강조하는 변질된 유학입니다. 이렇게 변질된 유학사상이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들어왔으나 우리 한민족은 순수한 본래의 천성을 회복하는 복본(複本: 변하지 않는 ᄒᆞᆫ 마음)을 추구하는 민족이기에 변하는 분별심에 뿌리를 둔 변질된 유학사상과는 결이 맞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뿌리가 약한 변질된 유학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한(漢)나라가 말기에는 유학의 명분과 의리가 무너지면서 허무주의와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쾌락주의가 등장했습니다. 한(漢)나라가 망하고 남북조시대의 혼란기인 A.D 300-400년이 되면서 허무주의와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쾌락주의와 같은 정신적 혼란기를 극복하고자 불교가 중국사회에 급격하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남북조시대 혼란기를 종식시킨 수(隋)나라는 통일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불교를 선택하였으나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결국 수(隋)나라는 39년 만에 망하고, 당(唐)나라가 세워졌습니다. 당(唐)나라도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불교를 선택하여 승려를 관직에까지 등용하고 불교가 국가종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상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중국에 정착된 불교는 우리의 선도사상이 약해짐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로 유입됩니다. 불교는 변하지 않는 ᄒᆞᆫ 마음인 본성(本性)을 찾는 우리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에 삼국은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인 A.D 372년, 백제는 침류왕 원년인 A.D 384년, 신라는 법흥왕 14년인 A.D 527년에 불교를 공인 합니다.

역사를 보면 외래사상을 무조건 배척한 사회도 유지되기 어려우며 그것을 쉽게 숭배하고 자신의 전통사상을 저버린 사회도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 것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외래사상을 융합해낸 사회가 언제나 살아남았습니다.

유럽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합리성과 게르만 문화의 진취성과 기독교 문화의 근본주의가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은 이들 세 요소가 융합되면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을 융합한 사회가 발전된 문명을 만듭니다.

고구려는 전통사상과 외래사상과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서 융합을 못 했고 백제는 전통사상 대신에 외래사상인 미륵불교에 전적으로 의존을 해서 융합을 못했습니다. 신라는 전통사상의 저항이 심해서 이차돈의 순교 사건이 생길 정도로 전통사상이 강했기에 불교를 공인하는데까지 고구려, 백제보다 150년이 늦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전통사상의 뿌리가 튼튼했기에 탄탄한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와 유학을 받아들였고 이것들을 융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것을 일러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곧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 서문을 보면 풍류란 다른 모든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원리였으며 그 어떠한 것보다 높은 차원의 사상적 원리로 간주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 벌판을 휩쓸었던 고구려와 바닷길을 제패하며 담로를 설치했던 백제의 멸망은 근본적으로는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이 융합되지 못했기에 내부분열로 멸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작았던 신라가 삼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외래사상을 융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이 강화도에 있는 전등사(傳燈寺)입니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A.D 381년에 아도화상이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북 선산)에 불교를 전파하러 가기 전에 강화도에 지은 사찰(寺刹)입니다. 그 당시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는데 고려 충렬왕 때 전등사(傳燈寺)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전등사는 강화도 정족산 삼랑성(三郞城) 안에 있습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맥(李陌)(1455~1528)이 저술한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지금 혈구(穴口: 강화도)에는 삼랑성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郞)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郎)은 삼신(三神)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三神)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삼랑은 ‘단군의 아들 셋’이란 뜻이 아니라 삼랑들은 삼랑성에 기거하면서 단군이 마니산 참성단에 천제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이나 의식 절차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관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단군 관련 유적이 두 곳 있습니다.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 참성단과 삼랑성입니다. 그런데 A.D 381년에 삼랑성 안에 전등사가 건립되었다는 것은 마니산 참성단에 천제를 지내는 행사가 중단되어서 삼랑성 안에 천제를 준비하는 건물들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선도 사상의 뿌리가 단군이고 단군이 천제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던 삼랑성이 A.D 381년경에는 방치되어 있었고 이렇게 방치된 곳에 외래사상인 불교의 사찰이 지어진 것을 볼 때 삼국시대에 이미 우리의 전통사상이 많이 약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외래사상을 융합해낸 사회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발전해 가듯이 우리나라가 통일을 이루고 발전을 하려면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외래사상을 융합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이 전등사는 알아도 단군 관련 유적 두 곳 중 한 곳인 삼랑성은 잘 모르고 관심이 적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전통사상이 많이 약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마니산 참성단과 삼랑성을 자주 가는데 참성단은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철책이 쳐져 있어 접근을 못 합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참성단이 보호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참성단이 갇혀 있는 것처럼 보여서 갈 때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국가에서 좀더 적극적인 관심과 재정을 투입하고 지혜를 모으면 참성단이 철책으로 갇혀 있지 않게 만들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랑성도 갈 때마다 느끼지만 전등사에는 사람들이 붐비는데 삼랑성 성곽을 걷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우리나라 전통사상의 뿌리에 해당하는 단군 관련 유적 두 곳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참성단과 삼랑성을 갈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집주인 힘이 약하면 손님들이 집주인 행세를 하면서 손님들끼리 다투게 됩니다. 집주인 힘이 강해야 집주인이 손님들을 잘 대접하며 화목하게 모임을 이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치로 우리의 전통사상인 단군의 홍익 정신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홍익 정신의 에너지가 커져야 그 힘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유교, 불교, 기독교,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외래사상과 융합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융합된 사상은 공멸(共滅)의 길로 가고 있는 인류를 공생(共生)의 길로 인도하는 밝은 등불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