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에서 권력에 의해 금서(禁書) 조치를 한 사실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이전에는 그런 사실이 눈에 안 보이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최초로 태종 12년에 『신비집(神祕集)』을 불태운 기록이 있습니다. 태종은 『신비집(神祕集)』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고 명했고 『신비집』을 살펴보고,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들이다.” 하고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불사르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신비집』이 어떤 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설에는 『신지비사(神誌祕詞)』라는 설이 있습니다. 『신지비사』는 단군조선 시기의 신지(神誌)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책으로 역사서라고도 하고 비결서라고도 전해지는 책입니다.

『신지비사』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유사』 「흥법(興法)」에 “신지비사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아울러 주석하다’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영홍은 연개소문입니다. 연개소문이 『신지비사』의 서문과 주석을 썼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려사』 「열전」 〈김위제조(金謂磾條)〉에는 “신지비사에서 말하기를,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扶疎)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70개 나라가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땅의) 덕에 힘입어 신교(神敎)의 정기(神氣)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지비사』가 고려 때까지도 유포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에서 제후국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청해서 명나라를 받드는 제후국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선비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이색 선생의 지지를 못 받았고 선비들과 백성들의 반발도 매우 심했습니다. 따라서 왕권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이성계는 왕권을 빨리 안정시킬 목적으로 명나라에 의지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보다도 선비들과 백성들의 지지가 적었을 것입니다. 강력한 왕권은 백성들의 지지에서 나오는데 백성들의 지지가 약한 이방원도 마찬가지로 왕권 강화를 위해서 명나라의 힘에 의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태종 이방원은 명나라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신지비사』 책에 단군이 천자였고 중국의 순임금, 우임금 등이 단군에게 조공을 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면 이런 내용이 명나라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심기가 편할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우리에게 있는 고대 역사에 관한 기록을 모두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닐까? 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하게 됩니다.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된 면에서 태종과 유사한 임금으로 세조가 있습니다. 세조 역시 백성들의 민심의 지지가 약했기에 태종과 마찬가지로 명나라 황제의 지지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세조 때는 태종 때 없애고 남아 있는 고대사 관련 서적들을 모조리 없앴습니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5월 26일자 기록을 보면 세조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辨設)』, 『조대기(朝代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등과 같은 고대사 관련 서적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모두 수거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세조의 아들 예종 때에도 금서(禁書) 조치를 내려서 고대사 관련 서적들을 수거했습니다. 예종 때에는 금서를 관리가 바치면 두 품계를 올려주었고 상을 받겠다고 지원하는 사람과 관청 노비, 개인 노비에게는 무명 50필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금서를 감추어 두고 바치지 않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신고하면 신고한 사람은 위 사항에 따라 표창했고 금서를 감춘 사람은 참형에 처했습니다.

이런 금서 조치로 우리의 고대사 자료가 사라지면서 목은 이색 선생, 양촌 권근 선생으로 이어지던 우리 겨레 사상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융합하려는 맥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권근 선생 이후로는 성리학만 고집하는 편협한 학자들이 대거 등장하게 됩니다. 다행히 우리의 고대사 자료가 아직 사라지기 전에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은 우리 겨레 사상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융합해서 학문을 닦아 한마음을 깨우치고 실천했기에 중국에서 성인(聖人)으로 임금이 된 요(堯), 순(舜)과 같다고 해서 해동요순(海東堯舜)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마음을 깨우쳤기에 한마음을 통해서 당시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마음을 충실하게 따르므로 언제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했습니다. 백성들이 농사짓는 기술이 필요할 때는 『농사직설』 책을 만들어서 농사짓는 기술을 보급했습니다. 『농사직설』은 관리들이 농촌 현장을 찾아가 농부들의 경험담을 듣고 옮겨 놓은 책으로, 세종대왕은 경복궁 후원에 논 한 결을 만든 뒤 직접 농사를 지어 『농사직설』의 농법이 더 효과적임을 확인한 후 더욱 적극적으로 보급해 나갔습니다.

또한 명나라 역법을 쓰던 것을 우리 실정에 맞는 달력으로 바꿨는데 이는 중국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농사로는 생산량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절기에 맞게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이라는 달력을 만들어서 조선만의 독자적인 역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농사에 필요한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발명하게 했습니다.

백성들의 몸이 아프면 『의방유취』 책을 편찬해서 의술을 발전시키고 외국으로부터 침략의 위험이 있으면 신기전(神機箭)이라는 최신 무기도 개발하여 국방을 튼튼히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냈지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노비로서 천한 일을 하고 있어도 하늘이 낸 백성임에는 틀림이 없으므로 하늘이 낸 백성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노비가 임신했을 경우 출산 1개월 전부터 출산휴가를 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모든 사람을 하늘 사람인 천민(天民)으로 보았습니다.

세종대왕의 이런 마음은 우리 겨레의 천손사상(天孫思想)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 증거로 성리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세종대왕은 우리 겨레 뿌리인 단군에 관심을 갖고 바르지 못하게 되어 있는 단군사당(檀君社堂)을 바로 잡기 위해서 세종대왕 7년에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으로 배치했습니다. 바로 잡기 전에는 단군의 위패는 기자사당(箕子社堂)에 기자와 함께 모셔져 있었는데 기자의 신위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의 신위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위패의 위치로 보면 기자가 황제이고 단군이 제후인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중국의 사신이 기자사당에 다녀간 뒤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단군사당이 없던 것을 세종대왕이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으로 하도록 하여 단군에게 따로 제향하게 했습니다. 세종대왕 12년에는 단군사당에 있는 단군의 신위 판에 조선후단군지위(朝鮮候檀君之位)로 되어 있는 것에서 후(候)와 지위(之位)를 삭제하고 조선단군(朝鮮檀君)으로만 쓰게 했습니다. 단군을 조선후(朝鮮候)라 한 것은 중국의 제후라는 의미가 되므로 이것을 삭제한 것입니다.

이렇게 단군사당을 세운 것으로 보아 세종대왕은 행촌 이암 선생의 『단군세기』와 목은 이색 선생의 사상을 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는 독서광으로 유명하였기에 『천부경』과 『삼일신고』도 접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예로부터 많이 읽혔고 특히 『천부경』은 목은 선생의 주석이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이므로 당시에도 상당히 읽혔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대왕 때 좌의정은 행촌 이암 선생의 손자인 이원(李原)공이었습니다. 그리고 『단군세기』에는 단군조선 시대 문자인 가림토 문자가 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가림토 문자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우리 겨레 역사와 사상을 관심갖고 공부했기에 세종대왕의 사상은 우리 겨레의 사상인 ‘하나 사상’, ‘천인일체사상’과 천인일체사상에서 파생된 천손 사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뿌리로 해서 성리학과 불교, 노장사상 등과 같은 여러 사상을 아우르는 성인(聖人)이 왕이 된 분이 세종대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표는 한마음을 회복하고 성인(聖人)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 이후로는 성리학을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성리학 안에 갇혀서 성리학 이외의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독선에 빠지게 되어 성리학 이론을 두고 편을 갈라 싸우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편 가르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이전투구의 싸움이 일어나고 이런 환경에서는 세종대왕과 같은 임금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이념 갈등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념 갈등이 해결되려면 우리 겨레의 사상인 하나 사상과 천손 사상이 확산되어 한마음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해결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마음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세종대왕과 같은 인물이 다시 출현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