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1, Embroidered painting, 154x134cm, 2019.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서울].
Love #1, Embroidered painting, 154x134cm, 2019.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인도네시아 작가 에코 누그로호(Eko Nugroho)는 벽화, 걸개그림 등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체를 기반으로 조각, 퍼포먼스, 만화책 등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여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누그로호가 미술대학을 다닐 당시 인도네시아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30여년간 인도네시아를 집권한 수하르토 정권을 몰아낸 개혁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작가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혁명, 그 과정에 수반된 개인의 의지와 집단의 폭력성을 모두 경험했다. 거리의 시위에서부터 시작한 인도네시아의 변혁은 팝아트나 만화와 같이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시각 미술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려온 누그로호의 작업 전반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신화와 우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인형극인 와양(Wayang)에서 받은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표현 기법을 인도네시아의 직물 염색법인 바틱이나 자수와 같은 지역적 기법과 연결시켜 작가만의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구축해왔다.

A Pot full of Peace Spells, Embroidered painting, 275 x 316 cm, 2018.  ⓒ Eko Nugroho and Arario Gallery.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서울]
A Pot full of Peace Spells, Embroidered painting, 275 x 316 cm, 2018. ⓒ Eko Nugroho and Arario Gallery.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아라리오갤러리(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길 84)는 인도네시아에서 현대 미술을 대변하고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에코 누그로호의 개인전 <Lost in Parody>을 2020년 9월 1일(화)부터 11월 14일(토)까지 개최한다. 이 개인전은 2013년 서울에서 개최한 개인전 이후 8년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두 번째 개인전으로 누그로호의 신작 20여점이 전시된다.

지하 전시장에 설치된 3.5미터가 넘는 대형 자수 작품은 인도네시아의 한 작은 마을의 전통 자수 기법에서 시작한다. 현대 사회 속 전통 자수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던 마을의 전통 자수를 살리기 위해 작가는 협업을 제안했고, 2007년부터 이 ‘자수 회화(embroidered painting)’를 제작해 오고 있다. 누그로호는 전통 자수 제작자와의 협업을 통해 사라져가는 전통 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찾아줄 수 있었다. 역사적 맥락을 이어 나가는 ‘자수 회화’ 작품에는 새로운 공동체 사회에 대한 작가의 믿음과 의지가 씨실과 날실처럼 짜여 있다.

Love #2, embroidered painting, 143x134cm, 2019.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서울]
Love #2, embroidered painting, 143x134cm, 2019.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층에 전시된 정방형의 캔버스 작품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주목하고자 한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용과 싸우는 기사, 인도네시아의 울창한 정글 속 얼굴을 가리고 잠복해 있는 피에로와 원숭이, 흐드러진 꽃 속에 티셔츠를 입고 서 있는 인물들은 모두 눈만 보이게 그려져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가리고 있는 이들의 눈에서는 특별한 의도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작가는 가면, 즉 가려진 얼굴에서 민주주의와 평등 그리고 평화 이면에 숨어있는 폭력과 차별, 그리고 역사가 목도해온 혼란을 비춰보고 있는 것이다.

만화의 한 컷처럼 화면을 가득 채운 누그로호의 화려한 붓질에서는 화합과 평화를 줄곧 소망해온 작가가 느껴온 혼란의 감정을 읽어 볼 수 있다. 작가의 말을 빌어 “아름답고 재미있는 패러디”와 “이것을 만들어 내는 나 자신이 그 일부가 되며, 동시에 미궁에 빠져버리는 상황”을 이번 <Lost in Parody>전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에코 누그로호는 이번 <Lost in Parody>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평화는 항상 논의되는 주제이지만 실제로 지구상에 진정 평화로운 장소는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조화'를 위한 전략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또한 피부색과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경계하고 편을 가르는 상황 속에서 미화되었던 민주주의의 허구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열하기 위해 뭉치고, 항상 아름답고 선한 것을 지향하지만 실제로 이를 위해서는 역겹고 지독한 언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사회 안에서 소란스럽게 발생하고 있는 이 모든 모순을 탐구하는 것이 최근 저의 작업이며, 이를 이번 아라리오의 전시에 담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민주주의, 공동체, 사랑, 평화라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과 그 이면의 진실에 대한 풍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풍자를 관람객들이 함께 웃으며 즐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