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터널' 스틸컷

“대한민국의 안전이 또다시 무너졌습니다. 이번에는 새로 완공된 터널입니다.” 

영화 <터널> 속 앵커의 대사가 마치 안방에서 TV 중계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와 닿습니다. 자동차 영업대리점 과장 정수(하정우)는 집으로 가던 중이었죠. 딸의 생일 케이크를 챙기고 운전하던 아버지 정수는 갑자기 무너져 내린 터널에 갇히고 맙니다. 1994년 출근길에 운전하던 시민들이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사고를 겪은 것과 흡사합니다. 이러한 재난영화를 보려고 전국에서 560만 명(25일 기준)이 찾았다고 하는군요. 

 
영화 <부산행>처럼 주인공을 공격하는 좀비도 없습니다. 정수에게는 휴대폰과 생수, 생일 케이크가 전부입니다. 오히려 터널 밖이 갈등이 많습니다. 구조보다 보고에 급급한 정부와 부실공사 시공업체 그리고 단독보도에만 혈안이 된 언론들의 행태가 대한민국의 민낯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되묻는 것이죠.
 
대형참사가 발생하면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습니다. 24일 발생한 이탈리아 지진으로 사망자 수가 250여 명으로 늘었다는 보도가 잇따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고 이후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그 나라의 위기관리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 우리 국민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학습이 많이 되어있습니다. 
 
▲ 영화 '터널' 스틸컷
 
2014년 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참사 이후 단 한 명의 죽음도 외면하지 않는 움직임이 커졌습니다. 대표적으로 강남역 10번 출구와 구의역 승강장은 시민들의 추모공간이 되었죠.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상가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자 많은 사람이 현장을 찾았습니다. 28일에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숨진 김 군(19)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은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였습니다.
 
물질주의가 커지는 오늘날, 인성(人性)의 가치는 이러한 연대의식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최근 구의역 포스트잇 편지를 모아서 《나는, 또한 당신입니다(스무살의 봄》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책명만 보더라도 너와 나는 남이 아닙니다. “민중은 개, 돼지와 같다”라고 말하고 1%를 지향하는 교육부 공무원에게선 찾을 수가 없습니다.
 
<터널>의 정수를 보고 있으면 화성에서 생존한 <마션>의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낙천적인 성격과 유머입니다. 세상이 절망과 같더라도 마음마저 뺏기지 않는 힘. 거기서 반전이 생기는 것이니깐요. 유대인들은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도 유머를 즐겼다고 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를 통해 죽음을 앞둔 유대인들을 붙잡아두었던 것은 유머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유머가 모든 위기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나 현실에서 구조대장이 어떠한 정신으로 임하느냐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모두가 포기하더라도 터널 안으로 들어간 대경(오달수)의 모습은 세월호 구조에 나선 잠수사들과 같습니다. 1명과 300명이 다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생명은 숫자로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영화 '터널' 스틸컷
 
유대교의 율법서 탈무드에는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말은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구출을 다룬 ‘쉰들러 리스트, 1993)’의 마지막 장면에도 나옵니다.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오열하는 쉰들러의 모습이 바로 인성회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성훈 감독은 시네21과의 인터뷰에서 “생명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라며 “생명 자체가 희망이고 승리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 생명은 누가 구하는 것일까요? 99% 민중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알고 기꺼이 도울 수 있어야지요. 이러한 민중의 깨어난 의식만큼 1% 지도자들도 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