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1908~1932)는 애국단원으로서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열린 일왕(日王)의 생일 축하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던진다. 윤 의사의 의거로 일본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했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에 큰 감동을 받은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 장재스(蔣介石)는 “100만 중국군도 못한 일을 한 조선인 청년이 해냈다”는 말과 함께 의심을 버리고 비로소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를 적극 돕기 시작하였다.

▲ 장제스(蔣介石) 대만 전 총통의 친필. 1967년 윤봉길 의사 유족들에게 전달되었다. [제공=국학원]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거사의 날 아침,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김해산 동지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이것이 영원한 떠남의 길임을 알기에 윤 의사는 자신의 새 시계와 김구 선생의 헌 시계를 바꿔 차고, 선생에게 수중에 남아있던 돈을 건넨다. 김구 선생은 이 모습을 《백범일지》로 남긴다.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 수가 없으니까요.” 해서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 군이 “자동찻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멘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 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 《백범일지》 中


윤봉길은 18세의 나이에 고향에서 농촌 계몽운동과 면학 분위기를 살리기 위하여 야학을 열었던 청년 교육자였다. 이후 그는 상해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세탁소 직원, 채소장사 등으로 연명을 하며 기회를 보다가 김구 선생을 찾아가 드디어 의거를 성사시키신다.

▲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동상 [사진=국학원]

이에 앞서 그는 정든 고향의 어른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人情)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중에서

윤 의사는 고향의 부인과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도 유언을 남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으로 성공하기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오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 수많은 분들이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을 찾는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계신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전국민족단체 연합 대표회장,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