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만춘 장군(梁萬春 將軍) (원암 장영주 作)

외세의 침략을 유난히 많이 받아온 우리역사에는 민족을 이어오기 위하여 목숨으로 나라를 지키신 분들이 많고 많다.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는 비록 그 모습이 모셔져 있지는 않지만 고구려 양만춘 장군도 그중 한 분이다. 불세출의 명장인 그는 지금으로부터 1370년 전인 서기 645년 6월 20일부터 9월 18일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구려와 세계 최강대국인 당나라와 맞붙었던 ‘안시성전투’의 주인공이다.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은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고구려 침공을 결심한다. 천하의 명궁이자 절대지지 않는 장수로도 유명했던 이세민은 당나라를 세워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세민은 지금도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명의 황제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존의 황제가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으로 군량·선박·각종 전투 기구를 준비하는 한편, 소수의 병력을 파견해 고구려 변경지대의 형세를 정탐한다. 이어 당나라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집권했으므로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시에 공격해 온다. 수송부대까지 합쳐 100~104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645년 4월 1일 당나라 장군 이세적이 이끄는 선봉은 회원진(현, 광녕 부근) 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통정진(현, 신민 부근)에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개시한다. 고구려의 혼란을 위해 여러 성을 동시에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당나라는 전군을 집결시켜 4월 15일부터 ‘개모성’(현, 무순 고성자 토성)을 공격, 26일에 함락시킨다.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은 요동반도의 천연의 요새인 비사성(현, 대련만 배안)을 5월 2일 함락시킨다.

한편 당태종 이세민도 요하를 건너와 이세적의 군대와 합류, 19일간에 걸친 집요한 공격 끝에 요동성(현, 요양), 6월 10일에는 난공불락의 백암성(현, 연주성)을 함락시킨다. 백암성 함락 후 다음 공격목표를 안시성(현, 해성 동남 영성자 산성 비정)으로 정하고, 6월 20일 총공격을 시작 한다.

이에 고구려는 고연수와 고혜진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말갈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게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오히려 당 군의 포위공격으로 살아남은 3만 6,800명의 군사와 함께 항복한다. 당 태종은 여세를 몰아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한다.

이에 반해 고구려는 안시성 구원군의 패배, 신라의 배후 공격, 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설연타와 제휴 실패로 안시성 지원능력을 완전하게 상실한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갇혀버린 섬이 되고 만다.

그러나 안시성은 성주(城主) 양만춘을 중심으로 88일간의 결사적인 항쟁으로 결국 당나라 대군을 물리친다. 이 전투 중에 당 태종 이세민은 양만춘 장군의 화살에 눈을 잃고 황망하게 퇴각하였다고 한다. 서기 647년, 당나라군의 고구려 2차 침공도 실패하자 병이 깊어진 이세민은 서기 649년, “절대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년∼1396)은 ‘정관음(貞觀吟)’라는 시를 지어 고구려의 안시성을 지켜낸 천하명장이자 절세충신인 양만춘을 추모하였다.

爲是囊中一物爾 위시낭중일물이 / (당태종은 고구려를) 주머니 속에 있는 한 물건인줄 가벼이 여겼으나
那知玄花落白羽 나지현화낙백호 / 뉘 알았으랴, 검은 꽃(당태종의 눈)이 흰 날개(양만춘의 화살)에 (맞 아) 떨어질 줄을.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가 그 옛날 안시성과 다를 바 없다. 모든 국민들이 양만춘의 마음이 되어 나라를 지켜내야 하는 이유이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