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순흥 안 씨로 할아버지는 안인수 선생이다. 아버지 안태훈 진사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사이에서 출생한 3남 1녀 중 맏아들이다. 아내는 김아려 여사이다. 배에 7개의 점이 있어서 ‘응칠’로 불렸고 망명생활 중에도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김구 선생 역시 해주 출신이다. 김구 선생은 안 의사보다 3살 연상이다. 김구 선생이 19세에 동학 접주가 되어 봉기하나 안 의사의 아버지에게 패하여 실패한다. 그러나 뜻이 분명한 ‘김구’라는 젊은이를 좋게 보았던 안태훈 진사의 권유로 그 집에서 머물며 잠시 피신하게 된다. 김구 선생은 그때 마주친 청년 안중근을 “활달하여 사냥을 좋아하고, 사냥한 것을 선선하게 나누어 주는 대장부”로 기억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복잡한 하얼빈 역에서 덩치 큰 러시아 군악대 병사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이토 히로부미를 도려내듯 저격하여 절명하게 하였다. 수행하는 일제의 관료들은 상처만 입었을 뿐이다. 이처럼 출중한 사격 솜씨는 평소 즐겼던 사냥에서 연마된 것이다.
청년 안중근은 서예가로 이미 이름이 나서 한양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실로 문무겸전의 행동가가 아닐 수 없다. 안 의사의 집은 황해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그런 집안의 부를 학교를 세우는데 쏟아부었다. 국민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해야 함을 깨닫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해 학교를 경영하며 삼흥학교도 설립하였다.
안중근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상해에 도착한다. 1907년에는 국채 보상의 관서 지부장이 되어 반일운동을 행동화했다.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한인 청년회 임시 사찰이 됐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거리에서 김기룡, 엄인섭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 동맹’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나라를 빼앗은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제거하기로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자살한다는 굳은 결심을 한다. 이때 안중근은 왼손의 약지를 자른다.
이토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천출신의 동갑인 우덕순 등과 함께 각각 채가구 역과 하얼빈 역에서 저격의 순간을 기다린다. 1909년 10월 26일, 마침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고, 25분간 러시아의 코코프 체프와 열차 회담을 마친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발을 옮기자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7연발 브라우닝 권총을 발사해 3발을 명중시켜 사살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코레아 우레(코리아 만세)” 삼창을 하고 체포된다.
이 사건은 즉시 해외로 타전되어 세계를 놀라게 한다. 취조 중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임을 밝히며 국제관례에 의해 정당한 포로로 군사재판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일제는 안 의사의 당당한 태도와 언변을 당할 수 없자, 급히 본국에서 최고의 검사와 판사를 파견하여 대처한다.
하지만 안 의사는 "이 거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라며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명쾌한 논리와 열정적인 반론에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된다.
결국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감방에서 그 유명한 ‘동양평화론’을 저술한다. ‘동양평화론’은 지금도 유효할 정도의 혜안과 지혜로 한·중·일 동양 삼국의 평화적 해결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놀란 일제는 탈고를 위하여 형 집행을 15일간 연기해 달라는 안 의사 측의 요청을 묵살한 채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한다. 26일은 5개월 전 이토가 하얼빈 역에서 죽은 날이니 저들의 속 좁은 복수극을 알 수 있다.
안 의사는 재판 내내, 단 한 번도 일제에 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약 5개월 동안 추운 겨울을 감옥에서 버티며 원하는 일본인들에게 각자의 처지에 맞는 글씨를 정성을 다하여 써주며 완성된 인성을 보여주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인 군사지휘관, 삼흥·돈의학교 교장인 구국의 교육자, 국채보상운동을 실천한 경제인이자 동양평화론을 제창한 경세인이기도 했다. 재산과 가족, 자신의 생명까지 모든 것을 독립에 바친 안 의사의 뜻을 이제는 우리가 이어받아야 한다. 독립을 넘어 ‘평화통일과 지구경영’을 이룰 사명이 지금 우리에게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전국민족단체 연합 대표회장,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