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은 제위 16년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 힘썼다. 왕이 승하한 후 이렇게 평가했다.

" 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굳세고 침착한 자질을 가진데다가 너그럽고 따스한 덕이 있고 넓고 큰 도량이 있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자애로운 심성은 아래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았다. 재위한 지 16년 동안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애쓴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다. 몸을 검속(檢束)하되 부족한 것처럼 하고 선(善)을 구하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하루 이틀 사이 번거로운 정무에 경계를 다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언제나 가졌다."

현종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왕이었다. 그가 왕으로 있던 시절,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백성의 삶은 고달펐고, 그런 백성을 보는 왕은 근심이 깊었다.

현종은 좋지 못한 운과 어려운 때를 만나, 수재·한재·풍재(風災)·상재(霜災)가 없는 해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병들고 외세가 핍박하였으나, 왕은 근심하고 노고하며 가다듬음으로써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걱정하고 충애(忠愛)함으로써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였다. 안으로는 음악이나 여색(女色)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놀이나 사냥의 즐거움을 추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릇 전대 제왕이 욕심껏 방종하고 사정(私情)을 행하며, 법도를 패하고 덕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이 마음이나 행동에 파고들지 못하였다.

왕이 이렇게 정치를 하니 어려운 시절, 백성들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전례(典禮)가 밝혀지자 인륜이 펴고 사설(邪說)이 사라짐에 인심이 바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 속으로 말할 적마다 "우리 왕의 덕은 한 문제(漢文帝)와 송 인종(宋仁宗)도 앞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 비록 신민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장수를 주지는 않았으나, 그 자애로운 마음과 자애롭다는 소문이 사람에게 깊이 감명되어 실로 영구히 잊지 못하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우뚝이 동방에 성덕(盛德)의 임금이 되었다."라고 했다. 

현종의 행장을 지은 윤회는 현종에게 최대한의 찬사를 바쳤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으로 말하면,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는 덕과 백성을 화하게 하고 빨리 덕을 공경하는 도는 진실로 옛날 명철하고 올바른 임금과 비해 볼 때 손색이 없다. 내가 적은 기년(紀年)의 글을 한번 보았으면 한다. 첫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고, 둘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여 하나의 생각도 백성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이 깊어서 교화가 믿음을 받게 되고, 백성이 감화됨에 하늘이 감응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장차 우리 문자 문손(文子文孫)이신 유자왕(孺子王)을 크게 인도해 주어 옛 나라를 새롭게 하고 국운을 길이 누리게 하며,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이어 우리 국가의 억만년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게 할 것이다.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현종실록')

현종은 아들 하나와 세 딸을 두었는데 아들이 뒤를 이은 숙종이다.  숙종의 즉위 교서를 보자.

"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하늘이 우리 가문에 재앙을 내리어 갑자기 큰 슬픔을 만났으므로, 소자(小子 : 숙종)가 그 명령을 새로 받게 되니, 군신(群臣)의 심정(心情)에 힘써 따라서 이에 신장(腎腸 : 진심)을 펴게되어 더욱 기가 꺾이고 마음이 허물어지는 듯하다. 국조(國朝)에서 왕통을 전함은 당우(唐虞 : 요순)와 융성을 견줄 만하였다."

현종이 승하하게 된 것을 숙종은 가문에 재앙이 내리어 갑자기 큰 슬픔을 만났다고 하였다. 나라에서 왕통을 전한 것을 보면 요임금과 순임금의 융성함과 견줄만 하다.

 " 종(宗)은 덕(德)으로서, 조(祖)는 공(功)으로서, 성현(聖賢)이 6대 7대나 일어났으며, 문모(文謨 : 문치)와 무열(武烈 : 무공)로서 자손에게 억만년을 물려 주셨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 현종)께서는 진실로 잘 계술(繼述)하셨다. 효우(孝友)는 마음을 따라 절로 일어났고 풍화(風化)는 사방에 미쳤으며, 청명(淸明)은 자신(自身)에 있었고 기욕(嗜欲)은 물러나게 되었다. 하늘의 노함을 공경하여 한결같이 지성으로 대하니, 성실에 감응하는 것이 메아리가 응하듯 하였고, 백성의 빈궁을 진휼(賑恤)함이 거의 빈 해가 없었으니, 도탄에 헤매던 사람이 모두 살게 되었으며, 영왕(寧王 : 효종)이 이루지 못한 공(功)을 장차 넓히려 하였고, 우리 조선의 위대할 수 있는 업을 크게 세우려 하셨다."

왕의 죽은 뒤 덕행이 뛰어나면 종(宗)자를 넣고, 외적을 막는 등 공이 뛰어나면 조(祖)자를 넣어 묘호를 짓는다. 이렇게 덕과 공이 뛰어난 왕이 6대 7대나 되어 문치와 무공으로서 자손에게 억만년을 이어가도록 튼튼하게 기틀을 닦았다. 그런 선왕의 업적 못지 않게 대행 대왕 즉 현종도 선왕들의 업적을 잘 이어 선정을 베풀었다.  효도와 우애가 절로 일어나고 아름다운 풍속이 사방에 퍼졌으며 몸 가짐을 청명하게 하는 이들이 많고 기욕을 버리게 되었다. 또 백성의 가난과 헐벌음을 구제하여 한 해도 빠지 않게 하였으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모두 살게 되었다.

"효심은 한이 없으되, 비통은 겨우 경렴(鏡奩 : 거울을 넣은 상자)에 맺혀졌고, 몽령(夢齡 :90)이 징조가 없으니 유명(遺命)이 갑자기 옥궤(玉几)에서 공언(公言)되었다. 병환이 나서 열흘이 되었는데도 약은 효과가 나지 않았으며, 내 몸이 대신 죽으려는 성심이 간절했는데도 신(神)이 굽어 살피지 않았었다. 종천(終天)까지 이르는 거창(巨創)한 일을 당했으니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미칠 수가 없었으며, 엄한 훈계를 받들 시일이 없게 되었으니 보잘것 없는 작은 내 몸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더구나 이 대위(大位 : 왕위)를 갑자기 계승하게 되니, 나로 하여금 지정(至情)을 억제하게 한다. 그러나 종묘·사직(社稷)의 큰 책임은 실로 후인(後人)에게 있으므로, 부형(父兄)·백관(百官)들이 같은 말을 하니 중인(衆人)의 소망을 막기가 어려웠다. 자성(慈聖 : 왕대비 )의 자상한 유시(諭示)를 우러러 본받아 성주(成周)의 예전 법도를 따랐다. 이에 본년(本年) 8월 23일 갑인(甲寅)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여 왕비(王妃)를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삼는다. 욕의(縟儀: 상복의 의식과 절차)를 대하매 슬퍼서 부르짖게 되고, 중기(重器: 왕위)를 주관하매 두려워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부왕(父王)의 자리에 앉아 부왕의 예절을 행하니 사모함이 갱장(羹墻)에 더욱 돈독하게 되고, 중대하고 어려운 책임을 맡게 되니 두려움은 실로 연곡(淵谷)보다 깊었다."

경렴(鏡奩)은 거울을 넣은 상자이다. 황제가 태후(太后)의 경렴(鏡奩) 속의 물건을 보고서 감동하여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가 '후한서(後漢書)' 음황후기(陰皇后記)에 전한다. 몽령(夢齡)은 장수를 의미한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꿈에 천제(天帝)가 무왕에게 90세의 장수(長壽)를 주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왔다. 옥궤(玉几)는 옥으로 장식한 안석(案席).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임종시(臨終時)에 옥궤(玉几)에 기대어 고명(顧命:유명(遺命))을 전달한 일이 있다. 부왕의 상중에 왕위를 이어받아야 하는 심정, 슬프고 두렵다. 부왕의 부재를 실감하니 슬프고, 이제 부왕 없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니 두렵다.
 

" 역대 임금의 큰 사업을 계승했으니, 어찌하면 하늘의 착한 명령을 맞이할 수 있겠으며, 선왕(先王)의 끼친 백성을 다스리게 되니, 어찌하면 우리 나라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혹시 부왕(父王)의 사업을 무너뜨릴까를 두려워할 뿐인데, 어찌 숙소(夙宵: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의 조심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을 감내하겠는가?
 

 마침내 큰 칭호를 공포(公布)하여, 모든 품계(品階)에게 두루 미치게 한다. 본월(本月) 23일 어둑새벽 이전부터 잡범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해 주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각기 한 자급(資級)을 올리되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한다.

아! 공을 도모하여 일을 마쳐서 시종(始終) 쇠퇴(衰頹)하지 않기를 원하고, 과오를 고치고 흠을 씻어버려 생육(生育)에까지 모두 용서되기를 바란다. 이런 까닭으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죄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교서는 대제학 김만기(金萬基)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