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뒤를 이어 명종이 보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렸다. 겨우 열두 살,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명종실록>에는 명종이 천성이 자효(慈孝)하고 공근(恭勤)하였으며 본디 문예(文藝)를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모비(문정왕후)가 청정(聽政)하게 되었으므로 정치가 외가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리하여 간사한 이들이 많이 득세하여 선량한 신하들이 귀양 가거나 살해되었으므로 명종은 외롭고 위태로왔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친정(親政)한 뒤에도 오히려 외척(外戚)을 믿고 환관을 가까이하여 정치가 날로 문란해졌다. 훗날 다행히 깨달아서 이양(李樑)과 윤원형(尹元衡)의 무리를 내쳤으므로 국가가 다시 안정되었다. 재위(在位) 23년에 수(壽)는 34세였다.

가볍게 생각했던 병이 점점 심해지면서 명종이 1567년 6월 28일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태학관이날에 태학생(太學生)으로 궐하에서 분곡(奔哭 상을 당하여 곡을 하다)한 자가 무려 수천 명이었다. 궐하에서 분곡한 자가 비단 태학생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백성들까지도 곡성을 그치지 않았으니 2기(紀, 1기는 12년) 동안에 어진 은혜가 만물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명종실록>에 기록된 평를 보자.

명종은 총명하고 총명하고 예지의 덕이 있었는데도 국가에 베풀지 못했다. 명종이 어둡거나 탐혹 잔인한 잘못이 없었는데도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명종이 군자(君子)를 쓰려고 하면 소인(小人)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죽여 버리고, 명종이 소인을 제거하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에게 붙좇는 것을 이롭게 여겨 서로 이끌어 나왔다. 명종에게 명덕(明德)이 있었는데 소인이 사이를 막아서 민정(民情)과 물의(物議)를 위로 통하지 못하게 했으며, 욕심이 없었는데 소인이 승순(承順)하게 인도해서 내수사로 하여금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게 하였다.

이단(異端)은 임금이 숭상하는 바가 아니었는데도 소인이 화복(禍福)으로 유도하여 사찰이 나라의 절반을 차지하게 했으며, 환관은 임금이 친애하는 바가 아닌데 소인이 출입하여 성사(城社)에 호서(狐鼠 여우와 쥐)가 들끓게 하였다. 임금이 재위한 20년 동안 덕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나라에 해를 끼친 것은 모두 소인들의 소행인데도 잘못은 모두 임금에게로 돌아갔다. 임금이 말년에는 앞서의 잘못을 뉘우쳐 권간을 제거하고 여러 현인을 신원 석방하여 말년의 효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하늘이 나이를 빌려주지 않아 갑자기 훙서하시어 사방과 후세로 하여금 다만 임금의 실덕(失德)만 알게 하고 임금의 성덕(聖德)이 일식(日蝕)이 다시 밝아진 것과 같아 우러러볼 만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게 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피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겠다. 아, 슬픈 일이다. 아, 불행한 것은 오직 임금 뿐인저. 문정 왕후(文定王后)를 어머니로 두었고 윤원형(尹元衡)을 신하로 두어 어머니는 불선(不善)을 가르치고 신하는 그 가르침에 순순히 따랐다. 아, 임금이 요순(堯舜)처럼 훌륭한 임금이 되지 못한 것은 상하의 보익과 교도가 없었기 때문이니, 아, 슬픈 일이다.

다른 신하는 애통함을 담았다.

임금은 천성이 순미(純美)하여 매사에 예법을 준수하였다. 문정 왕후의 삼년상에는 그 효사(孝思)를 다하였고, 모둔 제사(祭祀)의 의례를 모두 지성(至誠)으로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는 임금이 바야흐로 편치 않은 때였는데 부묘(祔廟)하는 예가 임박하자 몸소 전(奠)을 올리려 하므로 대신들이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임금이 따르지 않고 무더위를 무릅쓰고 질병을 참으며 행례를 하다 그길로 크게 병세가 악화되어 마침내는 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온 나라가 울부짖는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말하자니 눈물이 나온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지성으로 착한 이 좋아하는 뜻으로 이황(李滉)을 부르고, 또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자 탄식하는 뜻을 독서당(讀書堂)의 명제(命題)로 냈었다. 이에 이르러 이황이 임금의 뜻이 간절하고 은명(恩命)이 자주 내리는 것에 감격해 소명에 응하여 왔으나 사은(謝恩)하기도 전에 임금이 이미 승하하고 마니, 중외의 신민들이 그 현인을 좋아하는 뜻을 추모하여 더욱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명종이 일찍이 후사를 정하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 신하도 있었다.

명종은 타고난 자품이 영매하고 효우(孝友)가 순전하고 지극하여 양전(兩殿)을 공손히 받들어 모시되 즐거운 기색이 방안에 가득했으며, 신하를 예로써 대하여 온화하고 공경스런 덕이 내외에 넘쳤다. 사대(事大)와 우국(憂國)의 마음이 지성에서 나왔으며, 자상하고 측달(惻怛)한 전교가 날마다 아랫사람들에게 들렸으니, 그 행사의 자취를 살펴보면 일대의 영주(令主)라 할 만하다. 애석하게도 어려서 사위(嗣位)하여 모후(母后)가 수렴 청정을 하고 조정의 정사가 모두 고식적(姑息的)이어서 사림(士林) 사이에 큰 옥사가 연달아 일어난데다가 요승(妖僧)을 높이고 사랑하여 불교를 숭상했으나 모두 임금의 뜻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20년 동안 잘못된 정사가 날로 많아지고 좋은 법이란 칭찬은 들을 수 없었다. 부세는 무겁고 부역은 번거로웠으며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달프고 도적이 성행하여 국내의 재력이 고갈되었다.

그래서 임금이 비록 성덕(成德)을 품었어도 끝내 만의 하나도 펴지 못했으니 애석함을 이기겠는가. 그러다가 문정 왕후가 돌아가신 후에 비로소 만기(萬機)를 전단하게 되자 제일 먼저 양종을 혁파하여 오래 어두웠던 푸른 하늘을 시원히 보게 하였고, 원흉을 제거하여 굳게 맺혀진 뿌리를 제거하고, 을사 사화때 화를 당한 사람들을 소방(疏放)하여 먼 곳으로 폐척(廢斥)된 선량한 사람을 모두 내지(內地)로 양이(量移)하였다. 그래서 신인(神人)이 모두 기뻐하고 화기(和氣)가 온 천지에 두루 미쳐 태평 성대를 거의 바라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이 돌보지 않아 임금의 질병이 맨처음 순회 세자의 초상 때 걸리고 문정 왕후가 돌아가셨을 때 훼손되어 수년 이래로 심열이 안에서 끓어 온갖 병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훙서하시어 문득 백성을 버림으로 해서 동방에 큰 다스림이 없게 되었으니 아, 슬프다. 알 수 없는 것은 임금의 영명한 자질로 일찍이 세자를 세우는 성거(盛擧)를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세월을 미루어 가며 사람들 말을 굳게 거절했다는 점이다. 을축년 병이 위독할 때 미리 유덕한 분에게 부탁한다고 친히 스스로 써 내려서 신민으로 하여금 의지할 곳이 있음을 알게 하였으니 부탁할 사람을 얻었다고 할 만한데, 끝내 그 명호(名號)를 바로하여 춘궁(春宮: 세자)에 나가게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궁거(宮車)가 밤중에 멍에를 메워 나가자, 위로는 내전의 밝은 성려(聖慮)가 있고 아래로는 신료들의 추대가 있어서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었는데도 인심이 황황하여 오히려 위구한 마음을 품었던 것은 어찌 명위(名位)를 일찍이 정하지 않은 때문이 아니겠는가?

예종, 인종, 명종은 효심이 지극했다. 그래서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애통함에 몸을 돌보지 않아 건강을 해쳤다.  명종은 순회 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모후 문정 왕후가 별세한 때 건강을 크게 헤쳤다. 일국의 왕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명종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자를 책봉하지 않았다.  을축년(명종 20년, 1565)에 명종이 병을 앓았는데, 당시 세자였던 이부(李暊)는 이미 죽었고,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대신들이 조카들 중에서 미리 선정해 두기를 청하였다. 명종이 마침내 덕흥군(德興君)의 세째 아들 하성군 이균(李鈞)을 들어와 병 시중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때 대신들의 건저(建儲)의 논의에 따라 왕비와 함께 비밀리에 결정한 것으로서, 대신들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명호(明號)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별도로 한윤명(韓胤明)·정지연(鄭芝衍) 등을 사부(師傅)로 선정하여 가르치기도 하고 또 자주 불러들여 학업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성군을 볼 때마다 명종은 감탄하며 '덕흥(德興)은 참 복이 있는 사람이야.'하곤 했다.

 명종의 총애가 특별하였으므로 국내의 민심이 모두 하성군에게 집중되어 왔다.하지만 세자로 책봉하지 않아 명종이 승하할 무렵 논란이 있었다. 마침내 중전과 대신들이 명종의 뜻을 받들어 하성군(河城君)을 즉위하게 하니 바로 선조 임금이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이름을  연(㫟)으로 고쳤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의 셋째 아들이다.  모친은 하동 부부인 정씨(河東府夫人鄭氏)로 증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이다. 명종 7년 1552년 임자년 11월 11일 기축일에 인달방(仁達坊)의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기백과 도량이 영특하여 모두들 특이하게 여겼다. 독서를 매우 정밀히 하여 때로는 남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질문하기도 하는 바람에 사부들이 혹 대답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1567년 7월 3일 선조가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선조는 또 감히 어상(御床)에는 오르려 하지 않아 대신 이하 모두가 두세 번 권한 다음에야 자리에 올라 백관들로부터 하례를 받고 왕비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로 하였으며, 사형수 이하를 대사면하였다. 왕대비가 비로소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였다.

나이 열여섯이나 궁 밖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사의 체모를 모를 것인데 군국(軍國)의 큰 일을 홀로 결달한 수 없을 것으로 보고 대신들이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에게 수렴청정을 요청했다. 인순왕후는 8개월 동안 수렴청정을 하고 권력을 선조에게 돌려주어 친정하게 했다.

 선조는 즉위하자 모든 것을 법제에 따랐다. 종전에 너무 많았던 내번(內番) 환관(宦官) 수를 절반으로 줄이도록 명하고 언제나 문을 닫고 묵묵히 앉아 환시(宦侍)들과 접촉을 않았으므로, 조야(朝野)에서는 성덕(聖德)이 성취되기를 기대하였다.

선조의 유모(乳母)가 옥교(屋轎)를 타고 들어와 무슨 청을 하였다. 선조는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참람히 옥교를 타고 들어온 것을 책하기까지 하여 유모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걸어서 갔다.

임진왜란으로 전적이 불타 즉위교서도 사서에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