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5년. 임금이 인심을 잃었다.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은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反正)할 뜻을 두었다. 능양군과 가까운 친속인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대계(大計)를 세우고 동지를 규합하기에 이르렀다.  전 동지(同知) 김류(金瑬)가 의기투합하고, 전 부사(府使) 이귀(李貴),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및 문사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내응하기로 하고 그리하여 이서는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 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도 편비(褊裨)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파주(坡州)에서 회합하여 반정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런데 반정 계획이 누설되어 고변이 일어나 바야흐로 추국청을 설치하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曲宴)을 벌이던 참이라 그 일을 머물러 두고 재결하여 내리지 않았다. 추국이 흐지부지하게 되어 잡혀온 자를 풀어주게 되니 반정을 도모한 이들이 그날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렇게 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이 즉위하니 인조(仁祖)대왕이다.

이들이 임금을 몰아낸 이유로 광해의 악행과 실정을 들었다. 실록은 임해군, 영창 대군을 죽이고 왕대비의 친적을 멸족하고 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죄, 선왕조의 구신으로 바른 말을 하는 하는 신하는 모두 추방하여 당시 어진 선비가  죄에 걸리지 않으면 조야에 숨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다는 점,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히어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도가 없이 가혹하게 거두어들임으로써 백성들이 수화(水火) 속에 든 것 같았다고 하였다. 

 인조는 서궁에 유폐되었던  왕대비(王大妃)인 인목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1623년 3월 13일의 일이었다.  
 

임금을 쫓아내고 새 임금이 즉위했으니 왕대비의 승인이 필요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의 즉위에 관한 교서를 내렸다. 

"하늘이 만백성을 내고 그 중에다 임금을 세운 것은, 대개 인륜을 펴고 기강을 세워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온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이다. 선조 대왕께서 불행히도 적사(嫡嗣)가 없어 임시 방편으로 장유(長幼)의 차례를 어기고 광해로 세자를 삼았었는데, 동궁으로 있을 때 이미 실덕(失德)이 드러나 선묘(宣廟) 말년에 자못 후회하여 마지않았다. 즉위한 처음부터 못하는 짓이 없이 도리를 어겼는데, 우선 그 중 큰 것만을 거론하겠다.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왕조의 구신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와 부시(婦寺)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날라 벼슬을 사고 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 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에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 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중국 사신이 본국에 왔을 때 그를 구속하여 옥에 가두듯이 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 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능양군(綾陽君)은 선조 대왕의 손자이며 정원군(定遠君) 이부의 맏아들이다. 총명하고 어질며 비상한 위의가 있어 선조께서 몹시 사랑하여 궁중에서 길렀다. 그 소자(小字)를 천윤(天胤)이라 하였으니 그 이름을 지어준 의미가 깊다. 궤에 기대어 계실 때 손을 잡고 한숨을 지으시면서 정을 붙임이 다른 손자들과 달리 깊었다. 지금 대의를 분발하여 혼암한 자를 토평하고 나의 수욕(囚辱)을 벗겨주며 나의 위호(位號)를 회복해 주어 윤리와 기강이 바로 서고 종묘 사직이 다시 안정되었다. 그 공덕이 대단히 성대하여 신인 모두 귀부하는 바라, 대위(大位)에 나아가 선조의 뒤를 계승할 만하다. 부인 한씨(韓氏)를 책봉하여 왕비를 삼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하니 잘 알기를 바란다."(<인조실록>)

광해는 임금으로 덕을 잃었음을 먼저 지적하여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종묘 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고 하였다. 덧붙여 새로 일어난 청나라를 의식하며 명나라를 멀리한 죄 또한 큰 것이었다. 선조 때 군대를 보내 재조(再造), 즉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명나라를 멀리하는 광해군을 당시 조선 조정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인조의 즉위교서는 이러하였다.

"우리 국가는 열성(列聖)이 계승하여 그 가법이 가장 올바르다. 인으로 정사를 펴고 효로 다스려 그 빛나고 흡족한 교화가 소경 대왕(昭敬大王: 선조)에 이르러 극진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돌보지 않아 드디어 비운을 만났다. 지난 10여 년 이래로 적신 이이첨(李爾瞻)이 임금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국권을 천단하며 모자간에 이간을 붙여 끝내 윤리의 사변을 자아내 모후를 별궁으로 폐출하는 등 갖은 수욕을 가하였다. 진 소양왕(秦昭襄王)과 진 혜공(晋惠公)의 화도 이에 더 지나칠 수 없다. 더구나 부모와 같은 중국 조정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동방 예의의 풍속을 무너뜨려 삼강(三綱)이 땅을 쓸은 듯 없어졌으니, 이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사치가 도에 넘치고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정이 고갈되며 내외의 질서가 무너짐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망치고 종사를 전복하기에 충분하였다. 이와 같은 소소한 일들은 자전의 하교에 모두 거론되었으므로 더이상 재론하지 않는다.

나는 박덕한 사람으로 선왕의 훈계를 받들어 삼가 번저(藩邸)를 지키면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는데, 다행하게도 두세 사람의 충의를 지닌 신하가 종사의 위망을 걱정하고 인륜의 무너짐을 두려워하여 대의를 분발하여 내란을 안정시켜 자전의 위호를 바룬 후 이어 과덕한 이 몸을 추대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나는 아래로는 군정(群情)에 추대되고 위로는 자전의 뜻을 받드니 깊은 못과 골짜기에 임한 듯 두려운데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즉위한 처음에 이르러 반드시 경시(更始)의 교화를 펼 것을 생각하니, 무신년 이래 날조된 옥사이거나 연좌된 죄수 및 바른 말을 하다가 득죄한 자는 모두 사면하며, 모든 건축의 토목 공사의 부역과 조도사(調度使) 등의 가혹한 수탈도 일체 제거하며, 기타 백성을 침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던 귀척과 권세가가 가진 모든 전장(田庄)에 대한 세금 감면과 부역 면제도 함께 조사하여 제거하며, 내수사(內需司)와 대군방(大君房)에게 빼앗겼던 민전도 일일이 환급한다. 금월 13일 새벽 이전까지의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하여 유신(維新)의 뜻을 보인다.
아, 비상한 거사가 있으므로 드디어 비상한 은혜를 미루고 무한한 복을 누리므로 다시 무한한 애휼을 생각한다."(<인조실록>)

반정(反正)ㅡ바른 것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잘못된 옛 정치를 바로잡는 조치가 필요했다. 즉위 교서에는 "반드시 경시(更始 : 기존 정치의 폐해를 없애고 새롭게 시작함)의 교화를 펴겠다"고 했다. 그래서 무신년,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이래 날조된 옥사이거나 연좌된 죄수 및 바른 말을 하다가 죄를 짓게 된 자 모두 사면했다. 토목 공사로 백성의 고통이 심했으니 모든 건축의 토목 공사의 부역과 조도사(調度使) 등의 가혹한 수탈도 일체 없애기로 하였다.  백성을 침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던 귀척과 권세가가 가진 모든 전장(田庄)에 대한 세금 감면과 부역 면제도 함께 조사하여 제거하며, 내수사(內需司)와 대군방(大君房)에게 빼앗겼던 민전도 일일이 환급한다. 3월 13일 새벽 이전까지의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하여 유신(維新)의 뜻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두어 양곡을 조달하게 한 조도사(調度使), 이들의 횡포가 심각해 백성의 원성이 잦았다. 임진왜란 직후에도 문제가 되어 폐지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조선은 재정이 취약하여 폐지하기 어려웠다. 내수사(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서)와 대군방(대군과 왕자들의 궁과 저택)의 민전 침탈도 심각한 문제였다. 반정 세력은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인조의 즉위 교서에 시정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즉위교서대로 새로운 정치, 경시의 교화를 제대로 폈더라면 조선 백성들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