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즉위하여 탄생한 신생 조선은 신흥 사대부가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유교에 의해 국가를 다스리려고 했다. 이들은 중앙집권적인 문치주의를 표방했다.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포함된 '편민사목(便民事目)'에는 그 내용이 들어있다.
새 왕조는 고려 왕실과 고려 왕실에 충성하고 조선을 따르지 않는 신하를 처리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전쟁을 하여 왕조를 세운 것이 아닌 만큼 고려 왕족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기도 어려웠고 그대로 두면 새 왕조로 민심을 규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고민이 교서에 엿보인다.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신하가 많았다. 우선 유화정책으로 왕씨를 대했다. 공양왕을 비롯한 왕족을 유배 보내기도 했지만, 왕우에게 마전군을 주고 귀의군으로 봉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고려 충신들이 이 왕씨들을 중심으로 고려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조선은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섬에 유배된 왕씨들을 육지로 옮긴다며 배에 태워 바다에 빠뜨려 죽이기까지 했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먼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웠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종묘와 사직은 국가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예기(禮記)』왕제(王制)에 보면 "천자는 칠묘, 삼소삼목으로 하고 태조의 묘와 더불어 일곱이다. 제후는 오묘로 이소이목으로 하고 태조의 묘와 더불어 다섯이다. 대부는 일소일목으로 태조와 더불어 삼묘, 사는 일묘이다(天子七廟,三昭三穆,與大祖之廟而七. 諸侯五廟,二昭二穆,與大祖之廟而五. 大夫三廟,一昭一穆,與大祖之廟而三. 士一廟)라고 하였다.
황제는 자신의 1대조부터 6대조까지에다 개국 황제인 태조(太祖)의 신주를 모셔 7묘로 했다. 제후는 그보다 적게 오묘로 했다. 태조와 현 국왕의 1대조부터 4대조까지 5대조 국왕의 신주를 봉안했다.
소목(昭穆)은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를 말한다. 천자(天子)는 태조(太祖)를 중앙에 모시고, 2세·4세·6세는 소(昭)라 하여 왼편에, 3세·5세·7세는 목(穆)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3소·3목의 칠묘(七廟)가 되고, 제후(諸侯)는 2소·2목의 오묘(五廟)가 되며, 대부(大夫)는 1소·1목의 삼묘(三廟)가 된다.
중국 주나라 때 처음 등장한 종묘 제도가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 36대 신문왕 때이다. 종묘 제도가 확립된 것은 36대 혜공왕 때이다. 고려는 성종대에 이르러 종묘와 사직을 건립했다. 조선은 건국하자마자 종묘와 사직 조영을 서둘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와 달리 조선은 과거제도가 중시되었다. 관리가 되려면 과거를 합격해야 했다. 과거를 보지 않고 음서를 통해서 벼슬에 나가기도 했으나 과거 합격자를 우대하였기 때문에 음직에 나가더라도 과거에 응시했다. 또 문무 양반 체제를 표방하였다. 교육제도와 과거제의 정비는 조선에 충성할 새로운 인재의 확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편민사목에 포함된 내용은 관혼상제, 수령, 전곡, 역관, 호포, 형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새 왕조가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열망을 담았다.
다음은 즉위 교서에 반영된 '편민사목'이다.
"1. 천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
'1. 왕씨(王氏)의 후손인 왕우(王瑀)에게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 처자(妻子)와 동복(僮僕)들은 그전과 같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고, 소재 관사(所在官司)에서 힘써 구휼(救恤)하여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할 것이다."
"1. 문무(文武) 두 과거(科擧)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 생도(生徒)를 더 두고 강학(講學)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科擧)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중앙에는 성균 정록소(成均正錄所)와 지방에는 각도의 안렴사(按廉使)가 그 학교에서 경의(經義)에 밝고 덕행을 닦은 사람을 뽑아, 연령·본관(本貫), 삼대(三代)와 경서(徑書)에 통하는 바를 잘 갖추어 기록하여 성균관장이소(成均館長貳所)에 올려, 경에서 통하는 바를 시강(試講)하되 사서(四書)로부터 오경(五經)과 《통감(通鑑)》 이상을 통달한 사람을,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알아낸 사리(事理)의 정밀하고 소략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제일장(第一場)으로 하고, 입격(入格)한 사람은 예조(禮曹)로 보내면, 예조에서 표문(表文)·장주(章奏)·고부(古賦)를 시험하여 중장(中場)으로 하고, 책문(策問)을 시험하여 종장(終場)으로 할 것이며, 삼장(三場)을 통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상고하여 이조(吏曹)로 보내면, 이조에서 재주를 헤아려 탁용(擢用)하게 하고, 감시(監試)는 폐지할 것이다. 그 강무(講武)하는 법은 주장(主掌)한 훈련관(訓鍊觀)에서 때때로 《무경칠서(武經七書)》와 사어(射御)의 기술을 강습시켜,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기술의 정하고 거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출신패(出身牌)를 주고, 명단을 병조(兵曹)로 보내어 탁용(擢用)에 대비하게 할 것이다. "
1. 관혼 상제(冠婚喪祭)는 나라의 큰 법이니, 예조에 부탁하여 경전(經典)을 세밀히 구명하고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일정한 법령으로 정하여 인륜(人倫)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것이다.
1. 수령(守令)은 백성에게 가까운 직책이니 중시(重視)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간(臺諫)·육조(六曹)로 하여금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공평하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얻어 이 임무를 맡겨서 만 30개월이 되어, 치적(治績)이 현저하게 나타난 사람은 발탁 등용시키고, 천거된 사람이 적임자(適任者)가 아니면 천거한 사람[擧主]에게 죄가 미치게 할 것이다.
1. 충신(忠臣)·효자(孝子)·의부(義夫)·절부(節婦)는 풍속에 관계되니 권장(勸奬)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순방(詢訪)하여 위에 아뢰게 하여 우대해서 발탁 등용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旌表)하게 할 것이다.
1. 환과 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그 부역(賦役)을 면제해 줄 것이다.
1. 외방(外方)의 이속(吏屬)이 서울에 올라와서 부역에 종사함이 기인(其人)과 막사(幕士)와 같이 하여, 선군(選軍)을 설치함으로부터는 스스로 그 임무가 있었으나, 법이 오래 되매 폐단이 생겨서 노역을 노예(奴隷)와 같이 하니, 원망이 실로 많다. 지금부터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전곡(錢穀)의 경비(經費)는 나라의 떳떳한 법이니, 의성창(義成倉)·덕천창(德泉倉) 등의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는 삼사(三司)의 회계(會計) 출납(出納)하는 수효에 의뢰하고, 헌사(憲司)의 감찰(監察)은 풍저창(豐儲倉)과 광흥창(廣興倉)의 예(例)에 의거하여 할 것이다.
1. 역(驛)과 관(館)을 설치한 것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에 사명(使命)이 번거롭게 많아서 피폐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지금부터는 차견(差遣)하는 공적인 사행(使行)에게 〈관(官)에서〉 급료(給料)를 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사적인 용무로 왕래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공급(供給)을 정지하게 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주객(主客)을 모두 논죄(論罪)하게 할 것이다.
1. 배를 탄 군사[騎船軍]는 위험한 곳에 몸을 맡기고 힘을 다하여 적을 방어하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처지이다. 그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부역을 감면해 주게 하고 조호(助戶)를 더 정하여 윤번으로 배를 갈아타게 하고, 그 생선과 소금에서 나는 이익은 그들이 스스로 취(取)하도록 허용하고 관부(官府)에서 전매(專賣)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호포(戶布)를 설치한 것은 다만 잡공(雜貢)을 감면하기 위함인데, 고려의 말기에는 이미 호포(戶布)를 바치게 하고 또한 잡공(雜貢)도 징수하여 백성의 고통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는 호포를 일체 모두 감면하고, 그 각도에서 구은 소금은 안렴사(按廉使)에게 부탁하여 염장관(鹽場官)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과 무역하여 국가의 비용에 충당하게 할 것이다.
1. 국둔전(國屯田)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음죽(陰竹)의 둔전(屯田)을 제외하고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고려의 말기에는 형률(刑律)이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 형조(刑曹)·순군부(巡軍府)·가구소(街衢所)가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형벌이 적당하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는 형조는 형법(刑法)·청송(聽訟)·국힐(鞫詰)을 관장하고, 순군(巡軍)은 순작(巡綽)·포도(捕盜)·금란(禁亂)을 관장할 것이며, 그 형조에서 판결한 것은 비록 태죄(笞罪)를 범했더라도 반드시 사첩(謝貼)을 취(取)하고 관직을 파면시켜 누(累)가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선왕(先王)의 법을 만든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형(刑)을 판결하는 관원은 무릇 공사(公私)의 범죄를, 반드시 《대명률(大明律)》의 선칙(宣勅)을 추탈(追奪)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사첩(謝貼)을 회수하게 하고, 자산(資産)을 관청에 몰수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가산(家産)을 몰수하게 할 것이며, 그 부과(附過)해서 환직(還職)하는 것과 수속(收贖)해서 해임(解任)하는 것 등의 일은 일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판정하고, 그전의 폐단을 따르지 말 것이며, 가구소(街衢所)는 폐지할 것이다.
1. 전법(田法)은 한결같이 고려의 제도에 의거할 것이며, 만약 증감(增減)할 것이 있으면 주장관(主掌官)이 재량하여 위에 아뢰어 시행할 것이다.
1. 경상도(慶尙道)의 배에 싣는 공물(貢物)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또한 마땅히 감면할 것이다.
1. 유사(有司)가 상언(上言)하기를, ‘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설장수(偰長壽) 등 56인이 고려의 말기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맨처음 화단(禍端)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법에 처하여 장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 나는 오히려 이들을 가엾이 여겨 목숨을 보전하게 하니, 그 우현보·이색·설장수 등은 그 직첩(職帖)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해상(海上)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禹洪壽)·강회백(姜淮伯)·이숭인(李崇仁)·조호(趙瑚)·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이종학(李種學)·우홍득(禹洪得)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1백 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최을의(崔乙義)·박흥택(朴興澤)·김이(金履)·이내(李來)·김묘(金畝)·이종선(李種善)·우홍강(禹洪康)·서견(徐甄)·우홍명(禹洪命)·김첨(金瞻)·허응(許膺)·유향(柳珦)·이작(李作)·이신(李申)·안노생(安魯生)·권홍(權弘)·최함(崔咸)·이감(李敢)·최관(崔關)·이사영(李士潁)·유기(柳沂)·이첨(李詹)·우홍부(禹洪富)·강여(康餘)·김윤수(金允壽)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70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김남득(金南得)·강시(姜蓍)·이을진(李乙珍)·유정현(柳廷顯)·정우(鄭寓)·정과(鄭過)·정도(鄭蹈)·강인보(姜仁甫)·안준(安俊)·이당(李堂)·이실(李室)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할 것이며,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전오륜(全五倫)·정희(鄭熙) 등은 각기 본향(本鄕)에 안치(安置)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릇 범죄한 사람은 일죄(一罪)로서 보통의 사유(赦宥)에 용서되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는,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홍무(洪武) 25년(1392) 7월 28일 이른 새벽 이전으로부터 이미 발각된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
태조가 즉위하게 된 경위, 정당성을 강조하고 새로 펼쳐나갈 정강을 발표하고 사면령을 내린 내용이 교서에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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