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8대 임금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모후는 자성왕비, 파평(坡平)의 세족(世族)인 증 의정부 영의정(贈議政府領議政) 윤번(尹璠)의 딸이다.  이름은 이황(李晄)이고 자(字)는 평보(平甫)이다. 세종 32년 (1450)년 사저에서 탄생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재능이 뛰어나고 보통 사람보다 우수했다.  처음에 해양 대군(海陽大君)으로 봉해져서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바로 장순 왕후(章順王后)인데 일찍 승하하였다.

세조 3년(1457) 9월 왕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세조가 해양 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예종은 성품이 영리하고 현명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말이 적었다. 세자 시절 예정은  서책에 뜻을 두어 시학자(侍學者)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씩 진강(進講)하게 하고, 비록 몹시 춥거나 더울 때라고 하더라도 정지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덕업(德業)이 일찍 이루어지고 여망(輿望)이 날마다 높아져서,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세자가 육예(六藝)에 이미 통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부왕에게 큰 칭찬을 들었다.

세조 13년(1467) 세조가 몸이 불편하여 세자에게 모든 정무를 처리하도록 명하니, 듣고 처리하는 것이 밝고 적절했다. 세[조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일을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내가 근심이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9월에 세조의 병이 점점 위중하자 왕위를 잇도록 명하고, 소훈(昭訓) 청천 부원군(淸川府院君) 한백륜(韓伯倫)의 딸 한씨(韓氏)를 왕비로 삼았다.

세조는 병이 깊어지자 서둘러 보위를 세자에게 넘겨주었다. 정란을 일으켜 권좌에 올랐던 세조가 살아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예정은 세조 14년 1468년 9월 7일 즉위했다. 즉위 교서는 이러했다.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서 일찍이 세자의 자리에 있어 오직 뜻을 공경히 이어 받들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는데, 성화(成化) 4년(1468년) 9월 초7일에 부왕(父王) 전하께서 명을 내리시기를, ‘내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여 만기(萬幾)의 중함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에 병이 된다. 너에게 중기(重器)를 부탁하고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잘 조리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두세 번 굳이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어서 승락하고, 이날에 마지못해 대위(大位)에 올랐다. 부왕을 높여서 태상왕(太上王)으로 하고 모비(母妃)를 왕태비(王太妃)로 하며, 오직 군국(軍國)의 중한 일은 승품(承稟)하여 행하겠다. 돌아보건대 나의 작은 몸으로 큰 자리를 이어받아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직 조심하였을 뿐인데, 여러 신하들의 한 마음으로 도움에 힘입어 어렵고 큰 명(命)을 저버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처음 일을 당하여 너그럽고 어짐을 펴는 것이 마땅하므로, 이달 초7일 매상(昧爽: 먼 동이 틀 무렵) 이전으로부터 십악(十惡)과 강도(强盜)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아! 이미 무궁한 역수(歷數)를 이었으니, 여러 신민과 함께 새로와질 것이다."
 
즉위하게 된 까닭을 적고 부왕을 태상황, 모비를 왕태비로 높혔다. 예종은 또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 군사와 방위에 관해서는 태상왕인 세조에게 아뢰어 재가를 얻어 시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십악과 강도를 제외하고는 사면령을 내렸다.  

 십악(十惡)은 10대 대죄를 말하는데 '대명률(大明律)'에 정한 열 가지의 큰 죄이다.  '당률소의(唐律疏義)'에 의하면,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악역(惡逆)·부도(不道)·대불경(大不敬)·불효(不孝)·불목(不睦)·불의(不義)·내란(內亂)을 말하는데, 사유(赦宥: 사면)에서 제외되었다.

 모반(謀反)은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하는 것을 일컫는다. 모대역(謀大逆)은 종묘와 산릉(山陵), 궁궐을 훼손할 것을 꾀하는 것을 말한다. 모반(謀叛)은 무슨 뜻인가. 본국을 배반하여 몰래 타국을 따를 것을 꾀하는 것을 일컫는다.

네번째, 악역(惡逆)은 조부모, 부모, 시조부모, 시부모를 때린 경우 및 죽일 것을 꾀하는 경우, 백부모, 숙부모, 고모, 형, 누나, 외조부모나 남편을 죽인 경우를 일컫는다. 부도(不道)는 한 집안의 죽을죄를 짓지 않은 3인을 죽인 것 및 사람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 또 생기를 뽑아내는 것, 독금물을 만들어 비축하는 것, 가위눌리거나 홀리도록 하는 것을 일컫는다.

 여섯 째 대불경(大不敬)은 대사(大祀: 나라에서 지내는 큰 제사)에서 신에게 바친 물건이나 임금이 입거나 쓰는 물건을 훔치는 것, 임금의 도장을 훔치거나 위조하는 것, 임금이 먹을 약을 조제하면서 잘못하여 본래의 처방대로 하지 않는 것 및 봉제(封題: 약봉에 글을 적거나 또는 그 글)를 착오하는 것, 또는 수라상을 차리면서 잘못하여 식금(食禁: 식경에서 금하는 것)을 범하는 것, 임금이 거둥하는 데 쓰는 배를 잘못하여 견고하게 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일곱째, 불효(不孝)는 조부모, 부모, 시조부모, 시부모를 고소하거나 그들에게 악담이나 욕설을 하는 것 및 조부모 부모가 살아 잇는데 호적을 따로 하고 재산을 달리하거나 또는 봉양을 하지 않는 것, 부모상 중에 몸소 시집가고 장가들거나 또는 잔치를 벌이거나 상복을 벗고 평상복을 입는 것, 조부모 부모의 상을 듣고도 감추고 슬퍼하지 않는 것, 조부모 부보가 죽었다고 사칭하는 것을 일컫는다.

여덥째, 불목(不睦)은  8촌 이상 친족을 죽일 것을 꾀하는 것 및 꾸짖는 것, 남편 및 대공(大功) 이상 존속이나 연장자와 소공(小功) 존속을 때리거나 고소하는 것을 일걷는다. 대공은 오복(五服)의 하나로 굵은베로 지은 상복인데 대공친의 상사에 아홉 달 동안 입는다.  대공친 (大功親)은 대공(大功)을 입어야 하는 친척. 종형제, 출가 전의 종자매, 중자부, 중손, 중손녀, 질부, 남편의 조부모, 남편의 백숙부모, 남편의 질부 등을 통틀어 이른다. 소공(小功)은  약간 가는베로 지은 상복이다. 소공친의 상사(喪事)에 다섯 달 동안 입는다. 소공친은 소공(小功)을 입어야 하는 친척. 종조부모, 재종형제, 종질, 종손 등을 통틀어 이른다. 
아홉째, 불의(不義)는 국가기관의 통솔하에 있는 백성이 자기가 속한 지부, 지주, 지현을 죽이는 것, 군사가 자기를 거느리는 지휘, 천호, 백호를 죽이는 것, 이졸(吏卒)이 자기가 속한 관청의 5품 이상인 장관을 죽이는 것, 또는 수업을 받은 스승을 죽이는 것 및 남편의 상을 듣고도 감추고 슬퍼하지 않거나 또는 잔치를 벌이거나 상복을 벗고 평상복을 입는 것 및 개가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열번째 ·내란(內亂)은 소공 이상 친족이나 아버지, 할아버지의 첩을 간음하는 것 및 더불어 화간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 십악은 사유(赦宥: 사면)에서 제외되었다.  예종의 즉위 교서에 십악이 등장한 것을 보면 제도가 점차 완비되어 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예종은 즉위하여 국무에 힘쓰고 학문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행장(行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왕은 즉위한 뒤 국무를 처결하는 여가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독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싫어하지 아니하여, 금석(今昔)의 사변을 관철(貫徹)하였다. 교령을 내릴 때에는 모두 수찰(手札)로 쓰고, 또 친히 '역대세기(歷代世紀)'를 찬술하여 상하 수천년의 사실을 역력히 밝혀 유루(遺漏)한 것이 없게 하였으니, 진실로 사학(史學)의 요령이었다. 천성이 또 인효(仁孝)하여 모비(母妃)를 섬기는 데 날마다 세 차례씩 조근하여 정례(情禮)를 극진히 하였고, 구족(九族)을 친목하고 군하(群下)를 예우(禮遇)하였으며, 가법(家法)이 매우 엄하여 여알(女謁)을 행하지 못하였다.

왕은 혜장왕(세조)의 치평(治平)한 시대의 뒤를 이었으므로 비록 사방에 근심이 없었으나, 무비(武備)를 해이(解弛)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은부(殷富)하였으나 재용(財用)에 검박하였고, 대신을 연방(延訪)하고 허탄한 마음으로 간쟁(諫諍)을 받아들였으며, 정치가 백성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의 이로운 일과 병폐로운 일을 강구하여 시정하였다. 수령(守令)들이 탐오(貪汚)함을 염려하여 감사(監司)를 계유(戒諭)하여 엄혹하게 법으로써 다스렸고, 도둑들이 백성을 해롭게 할 것을 걱정하여 사신(使臣)을 제도에 보내어 순행하면서 도둑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더욱 죄인의 옥고(獄苦)를 염려하여 자주 고계(告戒)하는 교서를 내려, 죄의 경하고 중함과 일의 어렵고 쉬움으로써 재판의 한계를 정하여, 죄수로 하여금 원통하게 지체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모든 신료로 하여금 윤대(輪對)하게 하여 정치의 득실을 자문하고 부지런히 듣고 결단하며, 날이 늦도록 먹는 것도 잊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며, 농사를 권하고 학문을 일으키며, 중국 조정을 공경하게 섬기어 진헌(進獻)하는 물품을 반드시 친히 검찰하였다. 무릇 호령을 내어 사업을 조치하는 것이 모두 전열(前烈)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므로, 이 백성들이 바야흐로 좋은 세상이 될 것을 우러러 바랐는데,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으니 애달픈 생각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예종실록> 예종 1년(1469) 12월 11일)

예종은 1년 남짓 보위를 지키다 병을 얻어 승하하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된 것은 지나친 효성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세조가 병에 걸리자 세자인 예종은 시선(視膳 : 왕세자가 아침 저녁으로 임금이 드실 수라상을 몸소 돌보던 일)하고 상약(嘗藥 : 탕약을 미리 맛봄)하였으며, 밤낮으로 시병(侍病)하여 잠을 자지 못한 지가 여러 달이었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예종은 극도로 슬퍼하였다. '실록'에는 " 슬퍼함이 예제(禮制)에 넘어 작음(勺飮)도 마시지 않아서 드디어 절선(節宣 :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에 맞게 몸을 조리함)을 어기었다. "고 하였다. 겨울에 예종은  병이 생겨서 날로 심하였는데, 11월에 경복궁(景福宮)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20세였다.
 

예종의 기록을 보면 마치 문종과 비슷하다. 효성이 지극한 문종도 부왕인 세종이 병이 나자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하였고 세상을 떠나매 슬픔에 젖어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문종실록>에 전하는 모습을 보자. 

" 세종(世宗)이 또 훙서(薨逝)하시니, 음료(飮料)를 입에 넣지 않는 것이 3일이나 되니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윈 것이 예제(禮制)를 지나쳤으며, 상제(喪制)는 모두 옛날의 예절을 따라서 시행했습니다. 그가(문종) 세종(世宗)의 초상을 당했을 적에 등창을 앓은 것이 갓 나았으나 창구(瘡口)가 아물지 않았는데도 빈소(殯所)에 뫼시고 계시면서 울부짖고 가슴을 치니 대신(大臣)들이 모두 아뢰기를, ‘마땅히 물러가 거처하여 옥체(玉體)를 조보(調保)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굳이 청해도 허락하지 아니했으며, 삭망(朔望)과 상식(上食)에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면서 3년상(三年喪)을 마쳤었습니다."

20세에 세상을 떠난 예종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연산군은 왕이 되지 못하였을 터이다.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