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가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니 이로써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 왕조가 탄생하였다. 태조는 동북면 무장 출신.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한 이들은 주자학으로 무장한 신진 관료들이었다. 신진 관료들은 태조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만들려고 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왕조는 불교와 귀족 중심의 고려와는 크게 달랐다.

태조가 즉위한 지 사흘 후 7월 20일 사헌부에서 태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새 왕조를 연 태조가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시행하기를 바라는 10개 조목을 담았다. 나라를 지키고 다스리기 위해 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 리더십과 같은 항목이 많다. 그 10개 조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강(紀綱)을 세울 것.(一曰立紀綱)

둘째,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히 할 것.(二曰明賞罰)

세째, 군자(君子)와 친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 ( 三曰親君子遠小人)

네째,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 (四曰納諫諍)

다섯째, 참언(讒言)을 근절할 것. ( 五曰杜讒言)

여섯째, 안일(安逸)과 욕망을 경계할 것.(六曰戒逸欲)

일곱째, 절약과 검소를 숭상할 것. (七曰崇節儉)

여덟째, 환관(宦官)을 물리칠 것.(八曰斥宦官)

아홉째, 승니(僧尼)를 도태(淘汰)시킬 것.(九曰汰僧尼)

열째, 궁궐(宮闕)을 엄중하게 할 것.(十曰嚴宮闈)

사대부들은 충성을 말하지 않았다.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면 주위를 살피며 경계하고 눈치를 보게 마련인데 이 상소에는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 사대부들이 이성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역성혁명을 일으켰지만, 무장들이 뜻대로 하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듯하다. 이 상소에는 새 왕조를 연 태조가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시행하기를 바라는 10개 조목을 담았다. 그러면서 나라를 지키고 다스리기 위해 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 리더십과 같은 항목이 많다. 신하가 왕에게 이러한 덕목의 실천을 요구하는 나라. 조선은 이렇게 출발한다.
 

이 열 가지 조목을 본 태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환관(宦官)과 승니(僧尼)를 물리치고 도태시키는 일은 건국(建國)의 초기에 갑자기 시행할 수 없지마는, 나머지는 모두 시행하겠다."
 

태조의 즉위교서는 7월 28일 반포되었다. 교서(敎書)는 무슨 뜻인가. 교는 위에서 베푼 바를 아래서 본받는 것이다. 천자가 내리는 것을 '詔'(조)라 하고 제후가 내리는 것을 '敎'(교)라 한다.(敎, 上所施, 下所效也, 天子曰詔, 諸侯曰 敎)(정긍식 외, <역주 경국대전주해>, 한국법제연구원, 180쪽)

새 왕조를 연 태조의 즉위교서라 새 왕조가 앞으로 펼쳐나갈 정치 이상을 담았다. 이 즉위교서는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이 교서에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사목(便民事目) 17개조가 들어 있다. 새 왕조로서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시책을 발표한 것이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

태조의 즉위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임금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天生蒸民, 立之君長, 養之以相生, 治之以相安)" 이 이야기로 교서를 시작한 것은 고려 왕실이 군도(君道)를 잃어 인심이 배반하여 천명이 떠났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천명이 이성계에게 내려 왕씨를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6일 을미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말을 합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기를, ‘왕씨(王氏)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신우(辛禑)가 사이를 틈타서 왕위를 도적질했다가, 죄가 있어 사양하고 물러갔으나, 아들 창(昌)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國運)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다행히 장수(將帥)의 힘에 힘입어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으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나, 곧 혼미(昏迷)하고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므로, 여러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반(離叛)하여 능히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없었으니, 이른바 하늘이 폐하는 바이므로 누가 능히 이를 흥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직(社稷)은 반드시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고, 왕위는 오랫동안 비워 둘 수가 없는데, 공로와 덕망으로써 중외(中外)가 진심으로 붙좇으니, 마땅히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공민왕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오른 우왕은 왕씨가 아니라 승려인 신돈의 아들이라 했다. 고려말 이성계 등 신진 세력은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왕씨를 세운다는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을 주장해 두 왕을 폐하고 신종(神宗)의 7대손인 공양왕을 세웠다. 즉위교서에 " 신우가 왕위를 도적질했다가, 죄가 있어 사양하고 물러갔으나 아들 창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이 다시 끊어졌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 왕씨가 아닌 신씨가 왕위에 올랐으니 왕위를 도적질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즉위교서에서 고려 왕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고 한 것은 군도를 잃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군도를 잃으니 여러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반하여 종사(宗社) , 즉 종묘와 사직을 보전할 수 없으니 이는 하늘이 폐하는 바다.

그렇다고 덥석 왕위에 오를 수는 없는 법. 이성계는 덕이 적다고 몇번 사양하다 못이기는 척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다. 즉위교서에는 그 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한다."

백성이 따르니 천명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신하들은 말한다. 그런 하늘의 뜻을 거스릴 수 없다고 거듭 요청하니 이성계는 마지못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고려 왕실이 그래도 있고 고려를 따르는 이들이 많으니 국호를 새로 정하고 제도를 바꾸는 것은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즉위교서에는 백성의 마음을 모으고 새 왕조의 권위를 세우면서 고려 왕족과 충신들을 위한 조치를 담았다.

"이에 건국(建國)의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야 될 것이니, 모든 백성에게 편리한 사건을 조목별로 후면(後面)에 열거(列擧)한다. 아아,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하여 사정에 따라 조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래도 보좌하는 힘을 힘입어 새로운 정치를 이루려고 하니, 그대들 여러 사람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