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는 왕이 죽으면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식을 올렸다. 즉위식은 왕이 죽은 후 6일째 거행한다. 왕이 죽은 지 5일이 지나면 이제는 살아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자는 잠시 상복을 벗고 면복(冕服)으로 갈아 입은 후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즉위교서를 반포한다.
즉위교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선왕에 대한 애도의 뜻을 담는다. 둘째, 임금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둘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빨리 즉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종친과 대소 신료들의 간청에 못이겨 즉위하였음을 알리는 부분이다. 셋째, 죄인을 풀어주는 사면령을 포함한다.
이러한 즉위교서는 왕의 사후 왕위가 세자에게 넘어갈 때 따르는 형식이다. 역성(易姓)혁명이 일어나 왕조가 바뀌거나 정변이 일어나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는 달랐다. 왕조나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에 천명(天命)을 강조하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교서를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른다."(<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1년 7월 28일)
즉위교서는 왕이 반포하지만, 신하가 작성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취임사를 연설문 담당 비서관이 쓰는 것과 같다. 교서를 작성하는 신하는 당대의 정세에 정통해야 하고 그에 따른 시책을 제시하여야 했다. 왕의 권위를 높여 만백성이 우러르게 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려 그것을 해결하는 시책을 담아야 했다.
조선시대 왕위는 적장자(嫡長子), 즉 왕과 왕비 사이에 태어난 왕자 가운데 장자가 잇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적장자를 세자로 세우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 이방원조차 적장자가 아닌 자신이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또 적장자인 세자 양녕을 폐하고 셋째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렇게 적장자가 아닌 왕의 경우 아무래도 왕의 정당성과 권위를 높이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즉위교서는 일정 부분 이런 역할까지 하였으니 왕마다 즉위교서가 주는 의미가 달랐다.
즉위교서는 새로운 왕이 즉위했음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이 첫째이고 다음으로 향후 추진할 시책을 담은 국정 청사진 역할을 했다. 조선조 27대 왕의 즉위교서를 읽으면 조선 500여 년의 역사를 압축하여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시대 왕의 즉위 교서가 실려 있다. 즉위교서는 "王若曰(왕은 말하노라)"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왕조 시대 왕은 만백성의 어버이였으니 이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이제 <조선왕조실록> 에서 즉위교서를 뽑아 조선의 역사를 보려고 한다. 개국에서 멸망까지 통치자의 교서를 통해 살펴보는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