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2년(1450)년 2월 17일 세종대왕이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뒤를 이어 왕이 됐다. 조선 건국 이후 왕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임금으로 즉위한 것은 문종이 처음이다.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방석을 잃고 얼마 안 되어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왕이 된 방과는 2년 남짓 왕위에 있다가 동복 아우 방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세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운 후 52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이는 왕권과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는 보여준다.

세종의 치세로 조선이 안정기에 접어들어 국력이 신장되고 문화가 만개하였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실현하지는 못했다. 보위에 있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2월 23일 문종이 즉위하였다. 세종이 세상을 떠난 지 6일만이다. 왕이 죽은 후 5일째 입관을 하는데 이때 왕의 시신에 옷을 입히고 이불과 요를 싼 다음 관에 넣는다. 이를 대렴(大斂)이라 한다. 대렴 옷은 90벌. 입관을 사후 5일째 하는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5일 되어도 깨어나지 않으면 비로소 사망한 것으로 보고 대렴을 하는 것이다. 이후에 세자가 즉위를 한다. 이때 세자는 상복을 벗고 예식할 때 입는 면복으로 갈아입는다.

  면복(冕服) 을 입은 세자가  널[柩] 앞에서 유명(遺命)을 받고 빈전(殯殿) 문밖의 장전(帳殿)에 나가서 즉위(卽位)의 예식(禮式)을 하였다. 문종이  슬피 울면서 스스로 견디지 못하니 옷 소매가 다 젖었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벗고 상복(喪服)을 다시 입었다.

즉위를 했으니 즉위교서를 반포해야 하는데 국상 중에 즉위교서를 반포해야 하니 복장이 문제가 되었다. 상복을 입고 해야 하느냐, 근무복을 입고 해야 하느냐의 문제. 의정부에서는 상복과 조복(朝服)으로 갈라져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문종이 "처음에 부왕(父王)께서 예문(禮文)을 상정(詳定)할 적에 즉위(卽位)에서도 또한 길복(吉服)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하물며 교서를 반포할 때이겠는가?"하여 상복 차림으로 정했다.

마침내 교서(敎書)를 반포하기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교서는 이러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비로소 큰 왕업(王業)의 기초를 만드셨고, 태종(太宗)께서 전대(前代)의 공렬(功烈)을 능히 빛내셨고, 우리 선부왕(先父王)께서 큰 공업(功業)을 계승하시어 정성을 다하여 다스리기에 힘을 써서 예절이 갖추어지고 음악이 조화(調和)되어 중외(中外)가 평안한 지 이제 33년이 되었다. 다만 밤낮으로 정무(政務)에 바쁘시고, 더욱이 성학(聖學)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근심과 괴로움이 너무 지나쳐서 마침내 병환을 초래하게 되시었다. 이에 우매한 나에게 명령하여 여러 가지 정무(政務)에 참여하여 결단(決斷)하게 하고, 몸을 평안히 정양하여 만수 무강(萬壽無彊)하시기를 바랐었는데, 하늘이 돌보지 않으셔서 문득 신민(臣民)을 버리고 가셨으니, 기운이 꺾이고 마음이 상함을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
 

 종척(宗戚 : 종친과 외척)과 신료(臣寮)들이 말하기를, ‘대위(大位 ; 임금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고 하여 말을 합하여 굳이 청하므로, 마지 못하여 여정(輿情)에 따라서 경태(景泰) 원년 2월 22일에 즉위(卽位)하게 되었다. 지워진 책임의 무거움을 생각해 보건대 마치 깊은 못에 다다르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다. 내가 처음 즉위함에 있어 마땅히 관대(寬大)한 법조(法條)를 반포해야 할 것이므로, 이달 22일 매상(昧爽 : 먼동이 틀 무렵) 이전으로부터 모반(謀叛)·대역(大逆)·모반(謀反)과, 자손(子孫)으로서 조부모(祖父母)와 부모(父母)를 모살(謀殺)했거나 구매(毆罵)한 것과,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謀殺)한 것과,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謀殺)한 것과,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과, 고독(蠱毒)과 염매(魘魅)와 다만 강도(强盜)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이를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언(告言)하는 사람은 해당되는 그 죄로써 죄 줄 것이다.

아아! 모든 정사가 다 성규(成規)가 있지만, 그러나 지켜 가기는 어려우니 대소(大小) 신하들은 옛 법도를 신중히 지켜서 마음을 같이하여 협조하여 도와 길이 경사(慶事)에 이르기를 믿는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문종실록> 즉위년(1450)2월23일)

기운이 꺾이고 마음이 상함을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 보기 드문 효자였던 문종의 마음이 느끼지는 대목이다. 문종이 슬퍼하여 먹는 것을 잊을까 봐 세종은 "3일 안에는 죽을 조금 먹고, 3일 후에는 밥을 조금 먹어야 병이 나지 않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미리 당부했다. 하지만 문종은 이를 따르지 않아 몸에 종기가 나는 등 문제가 생겼다.
 

또한 부왕 없이 나라를 다스릴 일을 생각하니 책임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지워진 책임의 무거움을 생각해 보건대 마치 깊은 못에 다다르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다."

이런 마음으로 정사를 처리하면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큰 업적을 이룬 부왕의 뒤를 이어 그에 못지 않게 잘 해야 한다는 다짐도 느껴진다. 이런 부담 때문이었을까, 문종은 즉위한 지 3년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문종은 어진 임금이었다. 즉위(卽位)한 초기에 맨 먼저 언로(言路)를 넓히고,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을 구별하며, 농사를 힘쓰고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며,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중시(重視)하며, 나이 많은 이를 존경하고 절의(節義)를 장려(奬勵)하며, 수졸(戍卒)을 줄이고 전부(田賦)를 경감(輕減)하며, 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정지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며, 포흠(逋欠)을 감면(減免)하고 무고(無告)한 백성을 불쌍히 여겼다. 

세종에 이어 문종이 이렇게 어진 정치를 베프니 백성들은 어느 때보다 살기가 좋았다. 그래서 문종이 승하한 것을 온 백성이 슬퍼하였고 세자가 아직 어려 더욱 슬퍼하였다. 문종이 건강 관리를 잘하여 천수를 누렸더라면 조선의 운명, 우리의 운명이 달라졌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