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개혁파가 실권을 잡으면서 정도전은 전제(田制) 개혁에 나선다. 이는 당시 국민의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권문세가가 토지를 겸병하여 산천을 경계로 땅을 소유하였다. 재상이 되어도 송곳을 꽂을 만한 땅이 없었으니 백성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전제 개혁 상소를 올린 것은 대사헌 조준((趙浚)이었다. 조준이 올린 상소를 보자.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국용(國用)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며, 인재를 가려 기강을 진작시키고, 정령(政令)을 거행하는 것은 오늘날의 당연한 급선무입니다. 나라의 운수가 길고 짧은 것은 민생의 괴롭고 즐거움에 달려 있고, 민생의 괴롭고 즐거움은 전제(田制)의 고르고 고르지 못한 데 달려 있습니다. 문왕ㆍ무왕ㆍ주공이 정전(井田)을 제정하여 백성을 길렀기 때문에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이 8백여 년이었고, 한 나라가 전세(田稅)를 헐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한 것이 4백여 년이었으며, 당 나라가 백성의 토지를 고르게 나누었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한 것이 거의 3백 년이었고, 진(秦) 나라는 정전을 철폐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얻은 지 2대만에 망하였습니다. 신라 말기에도 토지를 고르게 나누지 못하고 부세(賦稅)가 무거웠으므로 도적이 떼지어 일어났습니다. 태조께서 일어나 즉위한 지 34일 만에 여러 신하를 접견하고 개연(慨然)히 탄식하기를, '근세(近世)에 전세(田稅)를 너무 심하게 받아 1경(一頃)당 받는 조세가 6섬에 이르러 백성이 살 수가 없으니, 내가 매우 불쌍히 여긴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십일(什一)의 제도를 사용하여 밭 1부(一負)에 벼 서되[三升]를 내게 하라.' 하고, 마침내 백성에게 3년간의 조세(租稅)를 감면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3국이 솥발처럼 대치하고, 영웅들이 승부를 다투어 재정의 용도가 급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전공(戰功)을 뒤로하고 백성 구제하는 일을 먼저 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마음이요, 요(堯)ㆍ순(舜)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인정(仁政)입니다.

삼한이 통일되자 곧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신하와 백성에게 나누어 주되, 백관은 그 품질(品秩)에 따라 주어서 본인이 죽은 뒤에는 회수하고, 부(府)의 군사는 20세에 서울로 들여서 60세가 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사대부로서 전지를 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회수하니, 사람마다 자중하여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여 예의가 일어나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습니다. 부(府)ㆍ위(衛)의 군사와 주(州)ㆍ군(郡)ㆍ진(津)ㆍ역(驛)의 아전이 각각 그 전지의 소출을 먹고 그 땅에 정착하여 생업을 편안히 하니,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비록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는 요 나라와 금 나라가 우리와 땅을 접하고 있어도 감히 침노하여 덤비지 못한 것은, 우리 태조께서 삼한의 땅을 나누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그 녹을 누리고 그 생업을 후하게 하며, 그 마음을 결속시켜 국가 천만 대의 원기(元氣)가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한인(閑人)이니, 공음(功蔭)이니, 투화(投化)니, 입진(入鎭)이니, 가급(加給)이니, 보급(補給)이니, 등과(登科)니, 별사(別賜)니 하는 명칭이 대(代)마다 증가하여 토지를 담당하는 관원이 번쇄(煩瑣)한 것을 견딜 수 없고, 토지를 주고 토지를 회수하는 법이 점점 무너져 해이하게 되었습니다.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틈을 타서 속이고 숨기는 것이 한이 없어서 이미 벼슬한 자 시집간 자도 오히려 한인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그대로 먹고, 군대에 나가지 않은 자도 속여서 군전(軍田)을 받으며, 아비가 토지를 몰래 가지고 있다가 사사로이 그 자식에게 물려주고, 자식은 몰래 토지를 가로채어 나라에 돌려주지 아니하여 이미 역분전(役分田)을 받고 또 한인전(閑人田)을 받았으며, 또 군전(軍田)을 받았습니다. 토지를 주고 받는 관원은 그것이 현재의 관리로서 역분전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그 자신이 과연 부병(府兵)인가, 그 아비가 과연 변진(邊鎭)에서 수자리서는가, 그 할아비가 과연 다른 나라로부터 귀순한 사람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조종(祖宗)의 토지를 주고 회수하는 법이 무너지고, 겸병(兼幷)하는 문이 한 번 열리니, 재상이 되면 당연히 밭 3백 결(結)을 받을 자가 일찍이 송곳 세울 만한 땅도 받을 곳이 없고, 재상이 되어서 녹 3백 60석을 받을 자가 오히려 20석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군사라는 것은 왕실을 호위하고 외적을 방비하는 것이며 그 옷과 양식과 기계가 모두 밭에서 나오는 것인데, 국가에서 기름진 땅을 떼어 42도부(都府)의 갑사(甲士) 10만여 명에게 녹으로 주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병사를 기를 비용이 없습니다. 조종조의 법은 곧 삼대(三代) 때에 농업에 군사를 붙여두었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와 토지제도가 모두 엉망이 되어 매양 급한 때를 당하면 농민을 징집해서 군대에 보충하기 때문에 군사가 약하여져 적의 먹이가 되고, 농민들의 양식을 쪼개어 군사를 기르기 때문에 호구가 줄어들어 고을이 망합니다. 조종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나누어준 토지를 한 집안 부자간의 사유물로 삼아서, 한 번도 문을 나와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은 자와, 한 번도 군문(軍門)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자가 비단옷과 쌀밥으로 하는 일도 없이 복을 누리며 공후(公侯)를 멸시하는데, 개국 공신의 후손과 밤낮으로 왕을 모시는 신하와, 여러 번 싸워 힘을 바친 장사(將士)는 도리어 1 묘(畝)의 토지나 송곳 세울 정도의 경작지조차 얻지 못해 그 부모와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니, 어떻게 충의를 권하고 일을 책임지우며 전공(戰功)을 장려하고 외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 판도사(版圖司)ㆍ전법사(典法司)와, 밖으로 수령(守令)ㆍ염사(廉使)가 그 본직을 저버리고 날마다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흘리고 붓을 불어 가며 토지 송사만 판결하느라, 문권을 상고하고 증거를 조사하며, 전호(佃戶)를 신문하고 고로(故老)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죄에 관련된 자가 옥에 가득하고 뜰에 가득하여 농사를 폐지하고 판결을 기다리니, 두어 달 밀린 문안(文案)이 산같이 쌓이고 1묘의 다툼이 수십 년간 계속되어, 침식을 잊고 판결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사전(私田)이 다툼의 실마리가 되어 송사가 번잡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1묘(畝)의 요구라도 혹시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원한을 품고 길가는 사람 보듯 하며, 심한 자는 상복을 벗자마자 그 시병(侍病)하던 노비를 때리며 그가 받은 토지의 공문서를 요구합니다. 부모에게 대하여도 이러한데 하물며 형제간이야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사전 때문에 인륜이 금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조정 사대부들이 겉으로는 서로 좋아하는 체하나 속마음으로는 서로 시기하여 암암리에 중상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사전으로 함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근년에는 겸병(兼幷)하는 일이 더욱 심해져서, 간악하고 흉한 도당들이 주(州)에 걸치고 군(郡)을 포괄하여, 산과 내를 경계(境界)로 삼고서 모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라 하며,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아 1묘(畝)의 주인이 5, 6명이 되고, 1년에 도조 받는 회수가 8, 9차에 이릅니다. 위로는 어분전(御分田)으로부터 종실ㆍ공신ㆍ조정ㆍ문무관의 토지와, 외역(外役)ㆍ진(津)ㆍ역(驛)ㆍ원(院)ㆍ관(館)의 토지와, 남이 여러 대 동안 심은 뽕나무와 지은 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앗아 차지하니, 호소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조종께서 토지를 나누어 신하와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한 것이 끝내는 신하와 백성을 해치게 할 뿐이니, 이것은 사전이 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토지를 겸병하는 집안의 도조를 거두는 무리가 병마사니, 부사(副使)니, 판관이니 일컫기도 하고 별좌(別坐)라 일컫기도 하는데, 따르는 자 수십 명이 말 수십 필을 타고 다니면서 수령을 능멸하고, 안렴사를 꺾고, 음식을 진탕 먹으며 주막집에서 돈을 흥청망청 씁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떼를 지어 횡행하며 방종 포학하고 침탈 노략하는 짓이 도적보다 몇 배나 심하여 외방(外方)이 이때문에 피폐해집니다. 전호(佃戶)의 집에 들어가서는 사람은 술과 밥을 배불리 먹고, 말은 곡식을 실컷 먹고, 햅쌀을 먼저 바치게 하며 면화ㆍ삼ㆍ여비ㆍ개암ㆍ밤ㆍ대추ㆍ육포(肉脯) 등을 강제로 팔게 해서 거두는 것이 조(租)의 10배는 되어 조를 바치기 전에 재산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실지로 토지의 수확량을 조사할 때에는 부(負)와 결(結)의 고하(高下)를 마음대로 하여, 한 결의 토지를 3, 4결로 정하고, 큰 말로 벼를 거두어 한 섬 거두는 것을 두 섬 거두어들여 그 수량을 채웁니다.

조종께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10분의 1에 그쳤는데, 지금 사가(私家)에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열배 천배나 되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을 어찌 대하며 국가의 인정(仁政)이 어찌 되겠습니까. 토지는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을 해치니,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백성이 사전(私田)의 조세를 낼 때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충당하는데 그 빚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고, 부모가 굶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으니, 원통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까지 통하여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여 수재와 한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니, 호구(戶口)가 이때문에 비게 되었으며, 왜놈들이 이때문에 깊숙이 들어와 천리에 시체가 뒹굴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탐욕스럽고 욕심 많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퍼져 사직과 종묘가 알을 포개 놓은 것보다 위태합니다. 신등은 원하건대, 태조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토지를 나누어 주신 법을 준수하고, 후인이 사사로이 주고받아 겸병하는 폐단을 고쳐, 선비도 아니고 군사도 아니고 나랏일을 맡은 자가 아니면 토지를 주지 말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이 주고받고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한계를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여 국가의 재용을 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며, 조정 신하를 우대하고 군사를 넉넉하게 길러 주십시오. 그러면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하여 예의가 일어나고 염치가 행해지며, 인륜이 밝아지고 송사가 없어져 사직의 기초가 반석같이 편안하고 태산같이 튼튼하며, 국가의 위엄이 뇌성처럼 진동하고 불꽃처럼 치성하여, 비록 외적의 침노가 있더라도 그 외적은 장차 저절로 시들고 무너질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간 먹을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다.' 하였는데, 근자에 서북으로 행차한 것이 겨우 두어 달뿐인데도 오히려 공사(公私)가 지탱하지 못하고 상하가 함께 곤궁하니, 만일 2, 3년간 수재와 한재가 생긴다면 어떻게 진휼할 것이며, 많은 군사의 양식과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것입니까. 하물며 지금 도성 안팎의 창고가 일시에 모두 비어서 군국(軍國)의 수용이 나올 곳이 없는데, 변방의 근심은 예측할 수가 없으니 만일 창졸간에 변이 생기면 집집마다 거두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양전(量田)할 때를 당해서 일정한 수(數)를 정하여 토지를 주기 전에 3년으로 한정하고 임시로 국가에서 거두어들인다면 군국의 수용을 충당할 수 있으며, 관원의 녹봉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안렴사(按廉使)의 직책은 건국 초기의 절도사(節度使)로서 군사와 백성을 총괄하고 한 지방을 도맡으므로, 수령은 직책을 받들어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히 하고, 방진(方鎭)은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힘껏 싸워서 지킨다면 권력은 한 곳으로 돌아갈 것이며, 사람들은 다른 바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이 안렴사를 한 방면의 통찰(統察)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이 주(州)ㆍ군(郡)을 공파(攻破)해도 방진(方鎭)은 거리낌이 없이 군사를 끼고 위엄만 기르며,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니, 적의 기세가 날마다 더욱 치성해집니다. 수령은 제멋대로 방자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주고 받으며, 음악과 여색에 빠져서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져도 구휼하지 않습니다. 안렴사가 된 자가 문서에 있는 수량과 실제 전곡(錢穀)의 차이만을 구구하게 따져 출척(黜陟)과 상벌의 법을 엄하게 하여 군민(軍民)의 행정을 진작시키지 못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안렴을 맡은 사람이 모두 정순(正順)ㆍ봉순(奉順)의 관원이고, 방진ㆍ부윤(府尹)ㆍ주목(州牧)ㆍ도호(都護)는 양부(兩部)의 대신과 봉익(奉翊)의 고관이기 때문에 대체로 왕명으로 받은 직책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품계가 낮다는 소소한 절차만 혐의를 삼아 기강을 떨치지 못하니 국사를 그르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원하건대, 조종께서 양부(兩府)에서 안렴사를 보내도록 정한 법을 본받고, 당나라에서 대신을 절도사로 보내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양부에서 청렴하고 위엄 있고 사무에 밝은 자를 가려 도안렴출척대사(都按廉黜陟大使)로 삼아서, 주ㆍ군을 순찰하여 전야(田野)가 개간되고, 호구가 증가되며, 송사가 적어지고, 부역이 고르며, 학교가 일어난 것 등을 가지고 수령을 출척(黜陟)하고, 방진(方鎭)을 순찰하여 호령이 엄하고 군기(軍器)가 정비되며, 병졸이 훈련되고, 둔전(屯田)이 정돈되며, 해구(海寇)가 종식된 것 등을 가지고 상벌을 행하되, 군관이 싸움에 패하여 한 주ㆍ군을 함몰하게 하였거나, 탐욕스럽고 더러워서 뇌물을 받은 수령은 목을 베며, 그 다음 죄를 지은 자는 관직을 파면하여 죄를 의논하고, 그 다음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논하되 공무는 행하도록 하여 기강을 진작하고, 3년을 체임(遞任)하는 동안에 도안렴의 견책을 받지 않은 수령은 곧 서울의 벼슬을 제수하고, 도안렴사는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여 내어 보내되, 원수(元帥) 이하가 모두 교외에 나와 영접하고, 참알(參謁)할 때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5품ㆍ6품으로 염사(廉使)가 된 자도 1년 만에 서로 교대하는 기한과 출척하고 고과(考課)하는 법은 도안렴사와 같게 하여 고정된 예를 만들지 말 것이며, 도안렴으로 주ㆍ군과 방진 수령을 출척하지 못하는 자는 사헌부에서 아뢰어 그의 직책을 파면하여 통절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수령이란 백성의 편안하고 괴로운 일을 살피며, 옥사와 송사를 결단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여 이 백성의 부모노릇을 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순문사와 안렴사가 주ㆍ군에서 군사를 징발할 때에 그 수령에게 책임을 지우면 호수(戶數)의 많고 적은 것과, 정부(丁夫)의 튼튼하고 약한 것을 수령이 잘 알 것이니 반드시 정예 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순문사와 안렴사가 매양 군사를 징발할 때면 수령들은 자기 고을을 사사로이 할까 염려하여, 남군(南郡)의 군사를 징발하려 하면 반드시 북군의 수령에게 명하고, 북군(北郡)의 수령은 남군에 가게 합니다. 북군의 수령이 남군에 가면 듣고 보는 것이 생소하기 때문에 속을까 두려워하여 먼저 때리기부터 합니다. 북군의 군사를 징발하라는 통첩이 남군에 이르면 남군의 수령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서서 곧 북군으로 가서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먼저 사람부터 형벌을 주며 그들의 부모를 가두고 처자를 때립니다. 군사의 징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호구를 점검하는 것과 군수품을 운송하는 데에도 가지가지로 징토(徵討)하고 독촉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두 고을이 서로 원망하여 마침내는 원수가 되어 서로 보복하니,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호구가 비게 됩니다. 왕의 뜻을 받아서 아래로 유포하고 교화를 선양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하건대, 수령은 지경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어 자기 고을만을 다스리게 할 것이며,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안렴사가 곧 파직시켜 내치고 조정에 보고하여 그 결원을 보충하게 하소서.

선왕이 순문사ㆍ안렴사 이외에는 사신을 지방에 파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신중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사신의 파견이 번다하여 수레가 연이어져서 역마를 타는 자가 한 필만 쓰라는 명령을 거짓으로 고쳐서 8, 9필에 이르고, 한 명의 사신을 모시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며, 게다가 순문사ㆍ안렴사의 차사(差使), 여러 원수가 파견하는 사람이 또한 모두 역마를 타고 주ㆍ군에 횡행하며, 관(館)과 역(驛)에 돌아다닙니다. 이런 문이 한 번 열리니, 무리를 이루고 말을 사랑하는 자들의 왕래와, 서울과 지방의 한가로운 자들의 사사로운 행차가 삼대와 좁쌀같이 많은데, 교대로 들락거리며 공공연하게 국고의 공급을 받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쇠잔한 고을과 파괴된 역(驛)의 아전들은 풀이 죽어서 손을 맞잡고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한정이 있는 공급비용으로 끝도 없는 사객(使客)을 접대하니 주ㆍ군이 피폐해지고 역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주군의 여러 사무 일체를 순문사와 안렴사에게 맡겨 그 책임을 지우고, 번잡한 사신을 파견하지 마소서. 조정의 문자는 모두 현령(懸鈴)으로 전달하고, 군정(軍情)으로 긴급한 중대사가 아니면 역마를 주지 말 것이며, 역마를 탄 자가 아니면 여러 고을과 각 역(驛)에 들어가서 공급을 받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주인과 손을 모두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 것이며, 각도의 순문사와 안렴사로 하여금 한결같이 조정의 이 제도를 본받아서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엄격하게 다스리소서."(<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4>.

조준의 상소에 이어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도 잇달아 글을 올려 사전(私田)을 개혁을 청하였다. 
 

조준의 상소는 신진사대부의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권문세가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국고가 축나 군인들에게 지급할 녹봉이 없었다. 이를 혁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성공할 수 없었다. 전제 개혁은 이성계 일파의 최대 업적이 되었으니 훗날 조선 왕조를 개창할 터전이 되기도 하였다.

조준이 상소를 올렸지만 전제 개혁은 정도전이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는 재정을 관장하는 삼사우사에 있었다. 정도전은 전국의 토지를 몰수하여 인구수에 따라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전국민을 자작농으로 만들려는 것이 정도전의 생각이었다.

정도전의 전제 개혁 사상은 권문세가에게는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하루 아침에 땅을 빼앗기게 되니 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이 무렵부터 정도전은 스승으로 모셨던 이색과 갈라섰고 어려부터 친했던 정몽주와도 멀어졌다. 대신 남은, 심효생, 황거정 이근 등 혁명을 함께 실천할 이들과 교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