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이 왕위(王位)에 올라 3년만에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이 단종이다. 단종은 1441년에 태어났다. 1448년 4월 초3일 세종(世宗)이 왕세손(王世孫)으로 봉하였다. 1450년 문종 즉위년  8월에 문종이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을 명나라에 보내어 국저(國儲 : 세자)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1451년 신미년 정월에 황제(皇帝)가 칙서로 봉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았다.

 1452년 임신년 5월 14일 문종이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殿)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왕세자를 받들어  즉위하니 단종이다. 문종이 승하한 후 5일째 되는 5월 18일 단종이 즉위하였다. 당시 단종은 열두 살. 부왕인 문종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니 어찌할 바 모르는 마음이 즉위 교서에 보인다.

이날 반포된 교서를 보자.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대동(大東 : 우리나라)을 웅거하여 차지하고, 태종(太宗)·세종(世宗)께서 선업(先業)을 빛내고 넓히어 문치(文治)로 태평에 이르고, 우리 선부왕(先父王 : 문종)께서 성한 덕과 지극한 효도로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여 원대한 것을 도모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임어(臨御)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여러 신하를 버리었으니 땅을 치고 울부짖어도 미칠 수 없어 애통이 망극하다. 돌아보건대 큰 위(位)는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경태(景泰) 3년 5월 18일에 즉위하노라. 생각건대 소자(小子)가, 때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외로이 상중에 있으면서 서정(庶政) 만기(萬機)를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니, 조종(祖宗)의 업을 능히 담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못[淵]과 얼음을 건너는 것과도 같이 율률(慄慄)하게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모든 사무를 매양 대신에게 물어 한결같이 열성(列聖)의 헌장(憲章)에 따라서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하기를 바라니, 너 중외의 대소 신료(臣僚)는 각각 너의 직책을 삼가하여, 힘써 나의 정치를 보좌해서 끝이 있도록 도모하기를 생각하라. 추은(推恩)의 법전과 연방(延訪)하는 조목과 합당히 행할 일들을 뒤에 조목조목 열거한다."(<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조서는 먼저 즉위하게 된 경위를 적었다.

 태조가 천명을 받아 조선을 개국하고 이어 태종과 세종이 조상이 남겨 놓은 사업을 빛내고 넓히어 문치로 태평 성대를 이루었다. 돌아가신 문종이 성대한 덕과 지극한 효도로 왕위를 물려받아 원대한 정치를 펴려고 하였으나 임금이 된지 얼마 안 되어 승하하였다. 갑자기 여러 신하를 버리었으니, 땅을 치고 울부짖어도 미칠 수 없어 애통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임금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경태(景泰) 3년, 1452년 즉위하였다. 

임금이 되어 정치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어린 나이에 홀로 상중에 있으면서 임금이 해야 할 정무를 생각하니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니 조상의 업을 능히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못과 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이 떨며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모든 일을 매양 대신에게 물어 대대로 여러 임금이 정한 규범에 따라 간난을 크게 구제하기를 바란다. 너 중외의 대소 신료(臣僚)는 각각 너의 직책을 삼가하여, 힘써 나의 정치를 보좌해서 끝이 있도록 도모하기를 생각하라.

단종은 살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면서 모든 일을 대신들에게 묻고 대대로 여러 임금이 정한 규범에 따라 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조정과 민간 대소 신료들에게 직책을 다하고 임금을 잘 보좌하여 좋은 결실을 맺자고 하였다. 

교서에는 사면령과 함께 시책도 함께 반포하였다.

"1. 경태(景泰) 3년 5월 18일 새벽녘 이전부터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과, 자손(子孫)으로서 조부모(祖父母)·부모(父母)를 모살(謀殺)·구매(毆罵)한 것과,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한 것과,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과,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과, 고독(蠱毒)·염매(魘魅)한 것과, 다만 강도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 주겠다."

이전의 왕 즉위 교서에 보이는 사면령과 크게 차이가 없다.

"1. 제도(諸道) 여러 고을의 인민들이 받은 의창(義倉)의 곡식은 각각 원수(元數)에서 3분의 1을 감하여 민생을 소생시킬 것.
1. 공처(公處)의 모실(耗失)·포흠(逋欠)·일체의 추징(推徵)하는 물건은 모두 다 감면할 것."

국왕이 새로 즉위하면서 백성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 대목이다. 고구려 고국천왕 때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했다가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진대법(賑貸法)이 시행되었고 고려 때는 의창이 시행되었다. 조선도 이를 이어 받아 개국 초인 1392년(태조 1)에 의창를 두었다. 궁민에게 관곡을 무이자로 대여했다가 그 의창을 통해 궁민에게 관곡을 무이자로 대여했다가 그 본수(本數)만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세종 때에는 의창 원곡수(元穀數)를 유지하기 위해 대여하는 의창 곡 1석마다 이자 3승(升)을 수납하도록 하였다. 단종은 궁민이 갚아야 할 의창 원곡을 3분의 1을 감해준 것이다.

또 관청의 감소나 분실한 것,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써버린 것, 일체의 추징하는 물건을 모두 다 감면해주었다.

"1. 옥(獄) 속의 괴로움이란 하루를 한 해같이 지낸다. 원통하고 지체됨이 있어 혹 화기(和氣)를 상할까 염려되니, 모름지기 급히 신리(申理)하고 분변하여 오래 체류(滯留)하게 하지 말고, 그 중에 마땅히 가두어 두어야 할 자도 또한 좋게 보호하여 큰 추위와 더위·장마에 병이 나서 옥중에서 죽는 일이 없게 할 것."

사면령과는 별개로 옥살이의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원통하고 지체되는 바가 있으면 화합하는 기운을 상할까 염려했다. 서둘러 억울한 이의 억울함을 들어 판단하여 오래 가두어두지 말고 가두어 둘 이도 잘 보호하여 병이 나서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1.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독폐잔질(篤廢殘疾)은 어진 정사의 우선되는 것이니, 중외의 유사(有司)는 곡진히 존휼(存恤)을 가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할 것.

1. 효자(孝子)·절부(節婦)는 중외의 유사가 실적을 명백하게 갖추어 계달(啓達)하여 정표(旌表)에 빙거할 것."

환과 고독(鰥寡孤獨)은 늙은 홀아비(鰥)와 홀어미(寡), 어려서 부모 없는 사람(孤),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獨)을 말한다. 이 네 부류의 사람을 맹자는 세상에서 가장 곤궁한 백성들이라 호소할 곳도 없다고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하(梁惠王下))

"1. 변방을 수비하고 농사에 힘쓰는 것을 제외하고 중외의 긴요하지 않은 공역(工役)과 일체의 부비(浮費 :일을 하는 데 써서 없어지는 돈)를 모두 다 정지하여 파할 것.
1. 부역(賦役)을 평균하게 하는 것은 민정(民政)의 중요한 일인데, 모든 차역(差役)하는 관리들이 과정(科定)하기를 한결같게 하지 못하여, 호부(豪富)하고 세력 있는 자는 구차히 면하고 고과(孤寡)가 오로지 그 괴로움을 받으니 내가 심히 불쌍하게 생각한다. 이제로부터 감히 전과 같이 불공평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감사(監司)가 규찰하여 다스릴 것."

조선도 단종 때 이르러 부역을 부과하는 데 그 업무를 담당한 관리들이 공정하지 못했다. 세력 있고 부유한 이들은 부역을 면하고 외롭고 곤궁한 자들이 부담을 많이 졌다. 단종을 이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공정을 기하게 했다.

"1. 농상(農桑)과 학교(學校)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니, 소재(所在)의 수령(守令)들은 허문(虛文)을 일삼지 말고, 독려하고 권과(勸課)하여 힘써서 실효를 보게 할 것.
1. 각도의 절제사(節制使)·처치사(處置使) 및 연변(沿邊)의 진수관(鎭守官)은 힘써 병마(兵馬)를 조련(操練)하고 군사를 무휼(撫恤)하며, 항상 조심스럽게 지키도록 노력하여 일체의 방어 사무를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지 말 것.
1. 감사(監司)는 법으로는 한 방면을 영솔하고 직책은 출척(黜陟)을 오로지 하니, 그 수령들이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이 방법에 어긋나고, 탐하고 방종하여 법대로 하지 않으며, 백성을 병들게 하고 다스림을 해치는 자는 거듭 규리(糾理)를 가할 것."

농업과 잠업, 학교 교육은 왕정의 근본. 또한 병농일치제였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니 즉위교서에 이렇게 강조했다.

"1. 내가 이제 어리고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예전의 거상(居喪)하던 대로 예(禮)의 글을 읽음에 있어서, 비록 빈소 옆에 있더라도 학업을 폐하지 않고 항상 경연관(經筵官)과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상례(喪禮)를 읽고, 날마다 경연 대신과 같이 강론에 힘쓰겠다."

12살의 임금, 어리고 학문이 성취되지 못했으니 대신들의 근심도 클 터. 단종은 거상 중에도 빈소 옆에 있더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항상 경연관과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단종은 조치하는 것을 모두 정부 즉 의정부와 육조와 더불어 의논하여 하겠다고 밝혔다. 인사도 사면도. 다음 내용을 보면 어린 국왕이 신료들에게 의논하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1. 고사(古事)의 정사가 모두 중국 서적에서 나왔는데, 하물며 내가 어리고 시위(施爲)에 어두우니 무릇 조치(措置)하는 것을 모두 정부(政府)·육조(六曹)와 더불어 의논하여 행하겠다.
1. 전에 육조에서 항상 직접 아뢰던 공사(公事)를 지금으로부터 모두 정부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해서 시행할 것.
1. 당상(堂上) 이상 관원과 대성(臺省) 정조(政曹)와 방어(防禦)에 긴하게 관계되는 연변(沿邊) 장수(將帥)와 수령의 제수는 모두 정부 정조(政曹)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고 그 나머지 3품 이하의 제수도 또한 모두 살피어 박의(駁議)하라. 무릇 제수에 관하여서는 내가 사사로이 가까운 자들은 쓰지 않고, 모두 공론대로 하겠다. 만일 특지(特旨)로 제수할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모든 정부 대신에게 의논하여 모두 가하다고 말한 연후에 제수하겠다.
1. 대소 과죄(科罪)는 모두 정부에 내리어 의논한 연후에 내가 마땅히 친히 결단하겠고 감히 좌우의 사사로운 청으로 가볍게 하고 중하게 하지는 않겠다.
1. 이미 이루어진 격례(格例)나, 가하다 부하다 할 것이 없는 일체의 항상 행할 수 있는 잡사(雜事)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공사는 모두 승지(承旨)로 하여금 면대하여 아뢰게 할 것이며, 그 중에서도 다시 상량(商量)하고 가부(可否)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부 대신과 더불어 친히 의논하여 결정하겠다.
1. 승정원(承政院)은 직책으로서 출납을 맡게 되는데 관계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대소 인원들은 일체 사사로운 일은 아뢰지 말 것.
1. 언로(言路)가 열리고 막히는 것은 이란(理亂)에 관계되는 것이니, 대간(臺諫)이 일을 말하는 것과 여러 사람이 진언(陳言)하는 것을 아울러 받아들이고 말이 비록 맞지는 않더라도 또한 마땅히 너그러이 용납하겠다.
1. 대소 신료들이 사사로이 서로 붕비(朋比)하여 공사를 폐하고 사사(私事)를 영위하거나 혹 망령되이 사설(邪說)을 일으켜서 시비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공가(公家)에 이익될 것이 없고 자기에게도 손(損)이 있으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죄 주고 용서하지 않겠다.
1. 군사[兵]를 맡은 대신의 집 군사는 진퇴시키지 못하고 한결같이 《육전(六典)》에 의할 것이며, 어기는 자는 헌사(憲司)가 규리(糾理)할 것.
1. 이조(吏曹)·병조(兵曹)의 집정가(執政家)에 분경(奔競)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이미 나타난 법령이 있지마는, 다만 서무(庶務)를 헤아려 의논하는 정부의 대신 및 귀근(貴近) 각처에서는 분경을 금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무뢰(無賴)·한잡(閑雜)의 무리들이 사사로이 서로 가서 뵈옵는 폐단이 진실로 다단(多端)하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한결같이 집정가들의 분경하는 예에 의하여 시행하고 공사로 인하여 진퇴하는 것과 출사하는 자는 이 한계에 두지 않을 것.
1. 상례(常例)를 제외하고 무릇 특사할 일이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정부에 의논한 뒤에 행할 것.
1. 대저 기교(奇巧)·완호(玩好)에 관계되는 물건은 진상하지 말고, 대소 신료가 식(式)에 의해 사은(謝恩)·하직(下直)·복명(復命)·문안(問安)하는 등의 일 외에 사사로운 일로 대궐에 나와 인연(因緣)으로 계달(啓達)하는 자는 반드시 유사에 붙이고 혹시라도 용서하지 말 것.
아아! 새로 천명을 받아 특별히 비상한 은혜에 젖었으니, 길이 기쁨을 누릴 것이며 무강한 복을 넓히기 바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