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정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이 지나 또다시 왕자들간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이방원이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난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이 딴 마음을 품었다.

정종이 왕비의 사이에 왕자가 없어 뒤를 이르려면 동복 아우가 후계자가 될 터였다. 태조의 셋째 익안군 이방의(李芳毅)는 성품이 순후하고 근신하여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야심이 있던 방간은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고, 정종이 즉위한 뒤에는 자기가 차례로서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바로 아랫동생 정안공 이방원이 걸림돌이었다. 방간은  선수를 쳐 정종 2년(1400) 군사를 일으켜 방원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방간은 패하여 토산(兎山)에 추방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자 조정에서는 세자 책봉 문제가 대두되었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윤(河崙) 등이 정안공을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청하자, 정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도당(都堂)에 그 뜻을 전하게 하였다.

"대저 나라의 근본이 정해진 연후에 민중의 뜻이 정하여지는 것이다. 이번의 변란은 정히 나라의 근본이 정하여지지 못한 까닭이다. 나에게 얼자(孽子)라 하는 것이 있으나, 그 난 날짜를 짚어 보면, 시기에 맞지 않아 애매하여 알기 어렵고, 또 혼미(昏迷)하고 유약하여 외방에 둔 지가 오래다. 지난번에 우연히 궁내에 들어왔지만, 지금 도로 밖으로 내보내었다. 또 예전 성왕(聖王)이 비록 적사(嫡嗣)가 있더라도 또한 어진이를 택하여[擇賢] 전위하였다. 동복 아우 정안공(靖安公)은 개국하는 초에 큰 공로가 있었고, 또 정사(定社)하던 즈음에 우리 형제 4, 5인이 성명(性命)을 보전한 것이 모두 그의 공이었다. 이제 명하여 세자를 삼고, 또 내외의 여러 군사(軍事)를 도독(都督)하게 한다."(<정종실록> 정종2년 2월1일)

정종은 정안군을 세자로 삼는 이유를 여럿 들었다. 첫째, 적장자가 없다. 정종은 적자가 없고 얼자, 첩의 자식이 있었으나 혼미하고 유약하여 궁 밖에 살게 한 지 오래 되었다. 궁에 들어왔어도 다시 밖으로 내보내 살게 했다. 아마도 궁에 살다가는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듯해서 나가게 한 듯 싶다. 둘째 성왕은 비록 적사(嫡嗣) 즉 뒤를 이을 적자가 있어도 택현(擇賢) , 어진이를 택하여 왕위를 물려주었다. 정종은 정안군을 세자로 선택한 것을 택현으로 풀이한 것이다. 셋째, 정안군은 조선 개국에 큰 공로가 있었다. 넷째, 정사(定社) 때  형제 4, 5인의 성명을 보전한 공로가 있었다. 이러하니 충분히 세자가 될 만하다고 하였다. 

정사(定社)는 나라의 사직을 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남은 등을 주살한 것을 말한다. 정도전 등이 사직을 흔들려고 했으나 이방원이 나서서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 공신을 정사공신이라 한다. 

방원이 세자가 되는 것을 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실록에는 이렇게 전한다.

"장구한 계책은 집정 대신(執政大臣)과 의논하여 하는 것이 옳다." (長遠之計, 謀諸執政大臣而爲之可也)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는 태조의 복잡한 심사가 엿보인다. 

이방원이 이렇게 하여 세자가 되었다. 이때 정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이(儲貳 : 세자)를 세우는 것은 국본(國本)을 정하는 것이요, 위호(位號)를 높이는 것은 인심을 정하는 것이다. 이에 전장(典章)에 따라서 책례(冊禮)를 거행한다. 너 정안공은 자질이 문무를 겸하고, 덕이 영명한 것을 갖추었다. 태상(太上)께서 개국(開國)하던 처음을 당하여 능히 대의(大義)를 주장하였고, 과형(寡兄)이 정사(定社)하던 날에 미치어 특히 큰 공을 세웠다. 하물며, 구가(謳歌)의 돌아가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감무(監撫)를 맡겨야 하겠다. 이로써 너에게 명하여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자식노릇하기도 또한 어렵다. 지친(至親)으로 택현(擇賢)으로 이미 대통(大統)을 잇는 자리에 처하였으니, 오직 충성하고 오직 효도하여 이로써 정사하는 방도를 도우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다 알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하여 경내(境內)에 사유(赦宥)하였는데,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부터 왕노릇하는 자가 저이(儲貳)를 세우는 것은 종사(宗祀)를 높이고 국본(國本)을 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문(禮文)을 상고하면, 적자(嫡子)와 동모제(同母弟)를 세운다는 말이 있는데, 혹은 세대(世代)로 하든지 혹은 차제(次弟)로 하든지 오직 지당하게 할 뿐이었다.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한 몸으로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공경하고 근신하여 다스리기를 생각한 지가 이제 2년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적사(嫡嗣)가 없고 다만 서얼(庶孽)이 있는데, 혼매하고 유약하여 지혜스럽지 못하니,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동기(同氣)의 지친을 생각하여 우우(友于)의 의를 두터이 하였더니, 생각지도 않게 방간이 간교하고 사곡한 말을 곧이 믿고, 망령되게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품어 군사를 내어 난을 꾸며서, 화가 불측한 데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서, 이내 곧 평정되어 하루도 못되어 청명하여졌다. 오히려 상우(象憂)의 정을 불쌍히 여기고 관벽(管辟)에 이르도록 차마 하지 못하여, 이미 방간을 사사 전장(田莊)에 안치하고, 당여(黨與) 사람들은 각각 죄의 경중에 따라 처결하였다.

대개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못하고 인심이 흔들리기 쉬움으로 인하여, 화란이 발생하여 이처럼 지극함에 이르렀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깊이 슬프도다. 마땅히 어진 모제(母弟)를 세워 굳건한 국본을 정해야만 하겠다. 정안공은 기운이 영명(英明)하게 빼어나고, 자질은 용맹과 지혜를 온전히 하였다. 문무의 도략(圖略)은 생지(生知)로부터 가졌고, 효제(孝悌)의 정성은 지성(至性)에서 나왔다. 시서(詩書)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정교(政敎)의 방법을 통달하였다. 태상왕을 보좌하여 개국의 공을 세웠고, 과인의 몸을 호위하여 정사(定社)의 공을 이루었다. 종사에서 길이 힘입은 것은 신민(臣民)이 함께 아는 바이다. 공과 덕이 이미 높으니, 구가(謳歌)하는 것이 모두 돌아간다. 그러므로, 책명하여 왕세자를 삼아서 여망(輿望)을 위로한다. 생각하건대, 저부(儲副)의 임무는 반드시 감무(監撫)의 권한을 겸하므로, 이에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맡도록 명한다.
아아! 너희 종친(宗親)·기로(耆老)·재보(宰輔)·신료(臣僚)와 중외 인민(中外人民)은 모두 내 뜻을 몸받아서 각각 너희 직책에 이바지하고, 원량(元良)의 덕에 공경하고 순종하여, 내 덕을 도우라. 이에 책명을 행하니, 마땅히 너그러운 법전을 반포하여야 하겠다. 건문(建文) 2년 2월 초4일 새벽 이전에 모반(謀叛)하고 대역(大逆)한 것, 조부모·부모를 죽인 것,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고독(蠱毒)하고 염매(魘魅)한 것, 강도를 범한 것, 고의로 살인(殺人)을 꾀한 것과, 방간(芳幹)의 당여(黨與)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죄의 경중이 없이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라.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 죄를 주겠다. 아아! 아비와 자식이 되었으니, 더욱 자효(慈孝)의 마음을 두텁게 하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미치기까지 함께 태평의 낙을 누리리라." (<정종실록> 정종2년 2월14일)

아들이 아니고 모제(母弟), 즉  동복아우를 세자로 세우는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한 것은 역시 적장자 계승 원칙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적자는 없고 서자만 있었다. 정종 스스로 혼매하고 유약하여 지혜스럽지 못하다고 하는데 진심이 아닐 수 있다. 

정안군이 세자가 된 후 연말이 가까워지자 정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정종2년(1400) 11월 11일. 선위(禪位) 교서(敎書)는 이러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조종(祖宗)께서 어질고 후하시므로 덕을 쌓아 큰 명(命)을 성취하고, 우리 ‘신무 태상왕(神武太上王)’이 처음 일어날 때에 미쳐, 왕세자(王世子)가 기선(幾先)에 밝아서 천명(天命)을 명확히 알고,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主唱)하여 큰 기업(基業)을 세웠으니, 우리 조선(朝鮮)의 개국이 세자의 공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서 물망이 모두 돌아갔는데, 뜻하지 않게도 권간(權姦)이 공을 탐하여 어린 얼자(孽子)를 세워 종사를 기울어뜨리려 하였다. 하늘이 그 충심(衷心)을 달래어 계책을 세워 감정(戡定)해서 종사를 편안히 하였으니, 우리 조선을 재조(再造)한 것도 또한 세자의 공에 힘입은 것이다. 나라는 이때에 이미 세자의 차지가 되었으나, 겸허를 고집하여 태상왕께 아뢰서 착하지 못한 내가 적장자(嫡長子)라 하여 즉위하도록 명하게 하였다. 내가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서 면강(勉强)하여 정사에 나간 지 지금 3년이 되었으나, 하늘 뜻이 허락하지 않고, 인심이 믿지 않아서, 황충과 가뭄이 재앙으로 되고, 요얼(妖孽)이 거듭 이르니, 진실로 과인[寡昧]의 부덕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있다. 하물며 내가 본래 풍질(風疾)이 있어 만기(萬機)에 현란(眩亂)하니,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정무에 응하면, 미류(彌留)에 이를까 두려웠다. 무거운 짐을 내놓아 덕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볼까 생각하였으니, 거의 위로는 하늘 마음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망(輿望)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왕세자는 강명(剛明)한 덕을 품수(稟受)하고 용맹과 지략의 자질이 빼어났다. 인의(仁義)는 타고날 때부터 가졌고, 효제(孝悌)는 지성(至誠)에서 비롯되었다. 학문은 의리에 정(精)하고, 영명한 꾀는 변통(變通)에 합하였다. 진실로 예철(睿哲)하기가 무리에 뛰어나는데, 겸공(謙恭)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일찍이 제세(濟世) 안민(安民)의 도량으로 능히 발란(撥亂) 반정(反正)의 공을 이루었다. 구가(謳歌)가 돌아가는 바요, 종사(宗社)가 의뢰하는 바이니,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마땅히 대통(大統)을 이어야 하겠다. 이제 세자에게 명하여 왕위(王位)를 전하여 즉위하게 한다. 나는 장차 물러나 사사 집에 돌아가서 한가롭게 놀고 편안히 봉양받으면서 백세(百歲)를 보전하겠다. 아아! 하늘과 사람의 정(情)은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종사의 대통(大統)은 마땅히 지친(至親)에게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부자 형제가 서로 잇는 것이 실로 고금의 통한 의리이다. 아아! 너희 종친(宗親)·기로(耆老)·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모두 내 뜻을 받아서 길이 유신(維新)의 정치를 보전하도록 하라."(<정종실록> 정종2년 11월11일)

태조는 왕위가 마침내 이방원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어 태조에게 선위(禪位)할 뜻을 고하니, 태조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정종2년(1400) 11월 13일 세자가 수창궁에 이르러 즉위하니 조선 3대 왕 태종이다.  만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유지(宥旨: 특별 사면령)를 발표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께서 조종(祖宗)의 쌓은 덕을 이어받고 천인(天人)의 협찬(協贊)을 얻어서, 크나큰 명(命)을 받고서 문득 동방(東方)을 차지하여, 성한 덕과 신통한 공과 큰 규모와 원대한 도략으로 우리 조선 억만년 무궁한 운조(運祚)를 이룩하였고, 우리 상왕(上王)께서는 적장자(嫡長子)로서 공경히 엄한 명(命)을 받고서 보위(寶位)에 즉위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이룬 지 이제 3년이다. 지난번에 적사(嫡嗣)가 없었으므로 미리 저부(儲副)를 세워야 한다고 하니, 이에 소자(小子)가 동모제(同母弟)의 지친(至親)이고, 또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할 때 조그마한 공효가 있다 하여 나를 책봉해 세자를 삼고 감무(監撫)의 책임을 맡기었는데, 감내하지 못할까 두려워 매양 조심하고 송구한 마음을 품었다. 어찌 생각하였으랴! 이달 11일에 홀연히 교지(敎旨)를 내려 이에 즉위하도록 명하시었다. 두세 번을 사양하였으나 이루어진 명령을 돌이킬 수가 없어서, 이미 13일 계유(癸酉)에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돌아보건대, 이 작은 몸이 대임(大任)을 응하여 받으니 무섭고 두려워서 깊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종친(宗親)·재보(宰輔)·대소 신료(大小臣僚)에 의뢰하니, 각각 마음을 경건히 하여 힘써 내 덕을 도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도록 하라. 명에 응하는 처음을 당하여 마땅히 너그러운 은전(恩典)을 펴서 경내에 사유(赦宥)하여야 하겠다. 건문(建文) 2년 11월 13일 새벽 이전의 상사(常赦)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 죄주겠다. 아아! 천지(天地)의 덕은 만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왕자(王者)의 덕은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늘과 사람의 두 사이에 위치하여 위로 아래로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면, 공경하고 어질게 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힘써 이 도에 따라서 부하(負荷)된 임무를 수행하겠다. 너희 신민들은 나의 지극한 회포를 몸받도록 하라.”(<정종실록> 정종2년 11월13일)
 

교서 형식을 취하여 즉위하게 된 경위를 적고 그다음 사면령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