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대 임금 세종. 세종대왕은 태조 6년 4월 10일 임진일, 양력으로는 1397년 5월 15일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이다. 세종대왕의 이름은 이도(李祹)이다. 자(字)는 원정(元正)이다. 세종은 조선건국 이후 한양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이다. 하지만 세종이 처음부터 왕자였던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있고 아버지 이방원이 왕자일 때 세종이 태어났다. 당시 태종은 왕자의 신분이었으나 다섯째여서 왕궁 밖 사저에서 살았다. 세종대왕이 사가에서 태어난 이유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한 이방원이 정종(定宗)으로부터 선위받아 1400년 11월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자가 되었다. 

 열두 살이 되던 태종 8년(1408)년 2월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그 후 4년 뒤 태종 12년 충녕은 형 효령과 함께 ‘대군(大君)’에 올려 봉하여졌다. 태종18년(1418) 6월 태종이 눈 밖에 난 세자 이제(李禔)를 폐하고 셋째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적장자(嫡長子) 승계 원칙을 고수하였다면 충령대군은 결코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태조은 세자를 폐하면서 양녕대군의 맏아들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던 것도 적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이 주장을 물리친 것이 택현론(擇賢論)이었다. 어진이를 골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택현론이 지지를 얻어가자 태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은 자질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 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 대군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3일).

태종이 효령대군을 거론한 것은 적장자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양녕의 아들이 아니고 형제 중에서 세우려면 둘째인 효령대군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효령은 왕이 될 재목은 아니었다. 자질이 뛰어나지 않고 성품이 매우 곧아 개좌(開坐)ㅡ업무를 처리하거나 자세하게 조목조목 일을 처리하는 바가 없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면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게다가 술을 한 모금도 하지 못했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며 외교를 하려면 임금이 술도 마실 줄 알아야 했으니 이 또한 불가했다.

 택현론에 의거 세자가 되다

이제 충녕을 보면 세자가 될 만한 자격을 두루 갖추었다. 총명하고 판단력이 빠른데다 학문을 매우 좋아하였다.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니어서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더워도 밤이 새도록 책을 읽어 부왕이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밤에는 글 읽는 것을 금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거론하는 첫 번째 자격으로 호학(好學)을 들었다. 건국 초기에는 무신들의 역할이 크다. 새로운 왕조를 여는 데는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국을 하게 되면 그 군사력이 왕조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피의 숙청이 진행되기도 한다. 조선도 이때 이미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었다. 태종도 용상에 앉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직 말위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형국이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치에서 문치(文治)로 전환해야 한다. 군사 자질이 뛰어난 왕보다는 학문에 밝은 왕이 등장해야 할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요청을 꿰뚫어본 태종은 충녕대군에서 문치의 가능성을 찾았고 세자의 첫 번째 조건으로 호학을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충녕대군은 또 치체(治體), 즉 정치의 강령, 요지, 정치의 법도(法度)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의견을 제시하는 데 진실로 합당하고, 또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제시했다.

   태종이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뭘까? 당시 세자가 아닌 대군은 조정의 일에 참여하는 데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할 뿐이다.”하고 서화(書畫)·화석(花石)·금슬(琴瑟) 등 모든 유희 애완(愛玩) 물을 두루 갖추어주었다. 정치와 관련된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충녕이 밤낮으로 글을 읽어 학문이 깊어짐에 따라 태종은 조정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충녕대군을 슬며시 불러 의견을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마다 충녕은 핵심을 꿰뚫고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진실로 타당성이 있고 게다가 참신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신료들에게 말함으로써 태종은 세종에게 정치에도 능력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충녕대군은 책만 읽는 백면서생이 아니었고 창의력까지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충녕은 외교력까지 겸비했다. 원(元)나라를 대신하여 중원에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명(明)나라는 조선을 예의주시하며 꽉 쥐려고 했다. 동북이 안정되어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으니 명으로서는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 있어야 했다. 이런 정세하에 신흥국 조선의 대명외교가 중요했다. 사신이 오면 세자뿐만 아니라 대군들도 자주 접대를 했다. 그때마다 충녕대군은 옷차림과 언어 행동거지가 두루 예(禮)에 맞았다. 중국 사신을 대하매 비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았고 일국의 대군으로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대화 내용 또한 훌륭하였다.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쳤다. 사신에게 술을 권하고 대작하되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았으니 외교상 결례를 하지 않았다. 조선에 자주 온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은 충녕대군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황엄은 충녕 대군을 보고 매양 똑똑하고 밝은 것을 칭찬하여 “영리하고 현명하기가 뛰어나 부왕父王을 닮았다. 동국(東國)의 전위(傳位)는 장차 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후 원민생(元閔生)이 세자를 봉하도록 청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이르니, 황엄이 그가 오게 된 일을 물었다. 원민생이 “세자를 바꾸기를 청합니다.”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필시 충녕을 봉하도록 청하는 것이리라.”하였다.
충녕 대군에게 이때 장대한 아들이 있었다. 훗날 문종이 된 충녕의 큰 아들은 당시 다섯 살이었다. 이 또한 충녕이 세자가 되는 데 힘을 보탰다. 큰 아들이 있으니 후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태종18년(1418) 6월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충녕의 나이 22세였다. 하지만 태종은 두 달 후 세자인 충녕에게 왕위까지 물려준다. 왕위를 빨리 물려주어 왕실을 안정시키고 세자가 정사를 제대로 할 때까지 후견인 노릇을 하겠다는 심사였다.

 일체의 제도는 태조와 부왕의 법도를 따르겠다

1418년 8월 11일 세종이 근정전에 나가 즉위교서를 반포하였다. 세자가 된 지 52일만이었다.

"삼가 생각하건대, 태조께서 홍업(洪業)을 초창하시고 부왕 전하께서 큰 사업을 이어받으시어, 삼가고 조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충성이 천자(天子)에게 이르고, 효하고 공경함이 신명(神明)에 통하여 나라의 안팎이 다스려 평안하고 나라의 창고가 넉넉하고 가득하며,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고, 문치(文治)는 융성하고 무위(武威)는 떨치었다. 그물이 들리면 눈이 열리듯이 대체가 바로 서매 세절(細節)이 따라 잡히어, 예(禮)가 일어나고 악(樂)이 갖추어져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민심에 흡족하게 젖어들었고, 융성(隆盛)한 공렬(功烈)은 사책(史冊)에 넘치어, 승평(昇平)의 극치(極致)를 이룸이 옛적에는 없었나니, 그러한 지 이에 20년이 되었다. 그런데 근자에 오랜 병환으로 말미암아 청정(聽政)하시기에 가쁘셔서 나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케 하시었다.

  나는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 어리어 일에 경력이 없으므로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얻지 못하여, 이에 영락 16년 무술(戊戌) 8월 초10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부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모후를 대비(大妃)로 높이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영락 16년 8월 초10일 새벽 이전의 사건은 모반 대역(謀叛大逆)이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한 것과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독약이나 귀신에게 저주하게 하여 고의로 꾀를 내어 사람을 죽인 것을 제하고, 다만 강도 외에는 이미 발각이 된 것이나 안 된 것이거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赦免)의 특지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세종실록> 세종 즉위년 8월 11일)

   이리하여 조선에는 세종의 치세가 열렸다. 교서 앞에서는 태종의 치적을 칭송하여 더없는 태평성대를 이룬 지 20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병으로 청정(廳政)하기가 어려워 왕위를 물려준다고 즉위하게 된 연유를 밝혔다.

그리고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가 어리어 일에 경력이 없어 여러 번 즉위를 사양하였음을 언급하였다. 세종 스스로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가 어리어 일에 경력이 없다고 하였다.  세종은 여러 공부를 하였으나 제왕이 되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는 세자가 아니었고 세자가 된 지 52일만에 왕위에 올랐으니 세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또 22세에 불과했으니 조정 대신들에 비교하면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없었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세종의 즉위 일성은 이것이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예상과 다르게 일찍 즉위하게 된 젊은 세자. 노대신들의 눈에는 불안감이 보였다. 세자 수업을 받지 못한 왕이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세종은 이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그리고 사면령을 내린다. 

세종은 왕위에 올라 32년 간 재위한 뒤 세종32년(1450) 2월 17일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였다. 향년 54세. 이 날짜 실록은 세종의 일생을 이렇게 적었다.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태종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한 후에도 매일 사야四夜(사경)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이어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하였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 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32년 2월17일)

요순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말한다. 이들은 덕으로 천하를 다스려 태평성세를 이루었다 이 시대를 요순시대(堯舜時代)라 일컬으며 치세治世의 모범으로 삼는다. 세종대왕이 덕으로 천하를 다스려 백성들이 살기가 편안하기가 요순시대와 같았다. 세종대왕을 바라보는 백성들과 사관의 평가가 당대에 이미 최고 평가를 내렸다.

세종대왕에게는 사후에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세종(世宗)은 왕명 또는 묘호(廟號)이다. 묘호는 종묘에 봉안할 때 왕이 세상을 떠난 뒤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다. 세종이라는 묘호를 풀어보면 ‘세상의 마루’라는 뜻이다. 세상을 덕으로 다스렸다는 의미도 있다. 옛 법에 공이 있으면 왕호에 조(祖)를 붙이고 덕이 있으면 종(宗)을 붙인다고 했다. 장헌(莊憲)은 명나라가 세종에게 올린 시호이다. 엄함과 공경으로써 백성에 임함을 장(莊)이라 하고, 착함을 행하여 기록할 만함을 헌(憲)이라 한다고 하였다. 왕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 백성을 공경하고 선정을 베풀어 길이 후세에 남겨둘 만한 일을 했다는 의미다. 멀리 외국에서도 세종대왕를 정확히 평가한 것이다.

다음은 세종대왕의 성품에 대한 평가다. 영리하여 학문에 뛰어나고 무에도 밝으며 어질고 뛰어나며 명철하고 효성스런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문무에 두루 밝으면서 어질고 명철하고 효성스럽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한 찬사도 없겠다. 세종대왕은 사람이 갖춰야 할 좋은 점은 다 갖춘 임금이란 말이다. 우리가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좋은 군주의 전형(典型)이다. 능호는 영릉(英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