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 조선.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임금을 쫓아냈다.
이를 중종반정(中宗 反正)이라 한다. 반정(反正)이라 함은 삿된 것에서 바른 것으로 돌아온다는 뜻이요, 폭군을 제거하여 새로운 임금, 어진 임금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제왕의 복위(復位)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왕조까지 바꾸는 것이지만, 반정은 왕조의 정통성은 인정하되 왕만 바꾼다. 연산군 때 중종반정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한 채 폭군인 연산군을 퇴위시키고 진성대군 중종을 옹립한 것이다.

연산군은 어떠한 임금이었는가? 그는 역사상 유래 없는 폭군(暴君)이다. 폭군(暴君)은 잔학한 임금이다. <맹자(孟子)> 등문공상(滕文公上)에 : 경계가 바르지 않고 농지가 고르지 않고 식량과 녹이 균등하지 않는 것은 폭군과 탐관오리가 그 경계를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라는말이 나오는데 일찍이 여기에 주를 단 조기(趙岐)의 주(注)에 ”폭군은 잔학한 군주다“(暴君,残虐之君)라고 하였다.

반정 뒤 연산군의 평가를 보자.
“연산은 성품이 포악하고 살피기를 좋아하여 정치를 가혹하게 하였다. 주색에 빠져 사사(祀事)를 폐하고 쫓겨난 어미를 추숭(追崇)하면서 대신(大臣)을 많이 죽였으며, 규간(規諫)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여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였으며, 서모(庶母)를 장살(杖殺)하고 여러 아우들을 찬극(竄殛)하였다.”

연산군은 유교에서 보면 최악이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로 왕실에서 제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그런데 연산군은 주색에 빠져 제사를 없앴다. 게다가 투기를 하여 부왕이 폐한 폐비를 추숭함으로써 부왕의 뜻을 어겼다. 잘못을 간하는 언관을 주찬(誅竄: 형벌로 죽이거나 귀양을 보냄)하였다. 서모를 장살하고 여러 아우들을 내처 죽였다.

연산군은 날마다 창기(娼妓)와 더불어 음란하게 놀아 법도가 없었고, 남의 처첩을 거리낌없이 간통하였다. 오랫동안 상복을 입는 것이 귀찮아 상제(喪制)를 고쳐 날로 달을 바꾸었다. 즉 3년상은 24개월인데 날로 달을 바꾸로 3년상을 24일로 하여 탈상을 했다. 이렇게 강상(綱常)이 전혀 없었고 죄악이 하늘에 넘쳐서 귀신과 사람이 분해하고 원망하였으므로 마침내 쫓겨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실록>에는 “예로부터 난폭한 임금이 비록 많았으나, 연산과 같이 심한 자는 아직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왕을 쫓아내고 신하들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모비(母妃)는 정현 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다. 신료들이 진성대군으로 보위를 잇게 하려고 대비 윤씨에게 말했다.

“지금 위에서 임금의 도리를 잃어 정령(政令)이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서 고생하며, 종사(宗社)는 위태롭기가 철류(綴旒 깃술)와 같으므로, 신 등은 자나깨나 근심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진성 대군은 대소 신민(臣民)의 촉망을 받은 지 이미 오래이므로, 이제 추대하여 종사의 계책을 삼고자 감히 대비의 분부를 여쭙니다.”

대비는 굳게 사양하고 세자, 연산군의 아들을 추천하였다.
“변변치 못한 어린 자식이 어찌 능히 중책을 감당하겠소? 세자는 나이가 장성하고 또 어지니, 보위를 이을 만하오.”
하지만 이를 신하들이 받아들이겠는가. 부왕을 쫓아내고 그 아들을 왕위에 세울 수는 없는 일. 영의정 유순 등이 다시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계책을 협의하여 대계(大計)가 정하여졌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성대군을 사저에서 맞아오게 하였다. 대군 또한 재삼 굳이 사양하였으나 중의(衆意)에 못 이겨 드디어 연(輦)을 타고 궁궐로 나아가 사정전(思政殿)에 들었다. 즉위에 앞서 먼저 대비의 교지를 반포하였다. 갑작스럽게 왕을 교체하려니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국가가 덕을 쌓은 지 백년에 깊고 두터운 은택이 민심을 흡족하게 하여, 만세토록 뽑히지 않을 기초를 마련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크게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잃어 민심이 흩어진 것이 마치 도탄에 떨어진 듯하다. 대소 신료가 모두 종사(宗社)를 중히 여겨 폐립(廢立)의 일로 와서 아뢰기를, ‘진성 대군 이역(晉城大君 李懌)은 일찍부터 인덕(仁德)이 있어 민심이 쏠리고 있으니, 모두 추대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니, 어리석은 이를 폐하고 밝은 이를 세우는 것은 고금(古今)에 통용되는 의리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진성을 사저(私邸)에서 맞아다가 대위(大位)에 나아가게 하고 전왕은 폐하여 교동(喬桐)에 안치하게 하노라.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지고, 종사가 위태로울 뻔하다가 다시 평안하여지니, 국가의 경사스러움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랴?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내리노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이 교지를 반포하니 여러 신하가 부복하여 명을 듣고 기뻐서 뛰며 춤추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드디어 진성 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는데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이었다. 즉위할 때는 마땅히 곤룡포의 면류관(冕旒冠)을 써야 한다. 어울리지 않은 관복을 한 것은 정변을 일으켜 급하게 즉위식을 했기 때문이다.
즉위 교서는 다음과 같다.

 “덕이 없는 내가 종실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으면서, 오직 겸손하게 몸을 단속하여 삼가 종저(宗邸)를 지킬 뿐이었다. 근년에 임금이 그 도리를 잃어 형정(刑政)이 번거롭고 가혹해졌으며 민심이 궁축(窮蹙)하여도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다행히도 종척(宗戚)과 문무의 신료들이 종사와 백성들에 대한 중책을 생각하여 대비의 분부를 받들고 같은 말로 추대해서 나에게 즉위할 것을 권하므로,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 금월 초2일에 경복궁에서 대위에 나아갔노라.

경사가 종방(宗祊)에 관계되어 마땅히 관전(寬典)을 반포하여야 할 것이다. 금월 초2일 새벽 이전까지의 모반 대역(謀叛大逆)과 고독(蠱毒)·염매(魘魅)와 고의로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했거나 죽인 죄,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죽였거나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謀殺)했거나 자손으로서 부모·조부모를 모살했거나 현행 강도이거나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도류(徒流)·부처(付處)되었거나 충군(充軍)·정속(定屬)·안치(安置)되었거나 갑자(연산군 10년 갑자사화) 이후에 귀양 갔거나 갇힌 사람은 이미 발각되었든 아직 발각되지 않았든, 이미 판결되었든 아직 판결되지 않았든 모두 석방하여 면제하노라. 감히 사면령 이전의 일을 가지고 고발하는 자는 그 고발한 죄로 죄줄 것이다.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을 올려주고,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여 주노라.
 

근년에 옛 법도를 마주 고쳐서 새로운 조항을 만든 것은 아울러 모두 탕제(蕩除)하고, 한결 같이 조종이 이루어놓은 법을 준수할 것이다. 아! 무강(無彊)한 아름다움을 맞았으니 다시 무강한 근심을 생각하게 되고, 비상한 경사가 있으니 마땅히 비상한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반정의 정신이 교서에 보인다. 근년에 옛 법도를 어지럽히고 새로 만든 조항은 아울러 모두 폐지하고 오로지 조종(祖宗), 선왕이 이루어놓은 법을 준수하겠다(近年變亂舊章, 新立條科, 竝皆蕩除, 一遵祖宗成憲). 연산군이 제 마음대로 만든 법을 폐지하여 옛날 법으로 가겠다, 이것에 쿠데타를 일으킨 신하들의 명분이었고 그 명분이 중종의 즉위 교서에도 반영되었다.

이 교서를 듣고 얼마 기뻤던지 즉위식에 참석한 신하가 모두 만세를 불렀는데 기뻐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庭臣咸呼萬歲, 歡聲雷騰). 만세는 황제 앞에서나 부르던 시절이라 조선에서 당시에는 경사스런 일에 천세(千歲)를 불렀다. 그런데 이날은 만세를 불렀으니 그 기쁨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폭정이 끝나고 좋은 정치를 선정(善政)을 바라는 군신들의 기대가 그만큼 컸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