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로 베일 속 단군을 역사로 끌어낸 행촌 이암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행촌 이암선생은 1297년에 출생하여 충선왕 5년, 1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충목왕 3년(1347년)에는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격인 '우대언(右代言)'이 되었고 11년 뒤(공민왕 7년)에는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참모총장격인 '서북면병마도원수(西北面兵馬都元帥)'가 되어 홍건적 4만 대군의 침입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 독립운동가 권오설(權五卨)이 소장 했던 <삼일신고(안동 독립운동 기념관 보관)> [제공=국학원]

 이암 선생은 1363년(공민왕 13년) 오랜 공직을 사임하고 강화도 '해운당(海雲堂)'에서 <단군세기>를 집필한다. 마치 <단군세기> 집필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 사명이었던 것처럼 이듬해 68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하였다.

 우리가 이암 선생을 주목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단군세기>에 있다. 선생이 <단군세기>를 짓지 않고 일개 대신으로 이승을 떠났다면, 국조 단군은 어찌 되었을까. 국조 단군은 그저 곰의 자식인 채로 남았을 것이고, 우리 역시 그의 자손이니 곰의 자식일 뿐이었을 것이다. 

 이암 선생은 <단군세기>의 서문을 통해 "역사는 길(道)이다"라고 했다. 즉, 역사란 민족이 생존하는 길이라는 말이다.  

 "아, 슬프구나! 부여(夫餘)에 부여의 도(道)가 없어진 후에 한(漢)나라 사람이 부여에 쳐들어왔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없어진 후에 몽고가 고려에 쳐들어왔다. 만일 그 당시에 미리 제정되어, 부여에 부여의 도가 있었다면 한나라 사람은 한나라로 쫓겨 가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있었다면 몽고인은 몽고로 쫓겨 갔을 것이다."

 이암 선생의 거룩함과 위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기계적, 산술적으로 역사를 기술하지 않았다. 우리의 홍익철학이 우주의 근간에서 유추된 '영원한 생명의 삼일사상(三一思想)' 임을 온 천하에 드높게 밝혔다.

 "성품은 저마다 타고난 명(命, 목숨)과 가를 수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된 목숨 역시 성품과 가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 몸에 깃든 성품이 명과 결합된 뒤라야, 내 몸 속에서 신화하기 이전의 본래 성품과 내 몸에서 기화하기 이전의 본래 명의 조화 경계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 담긴 영각(靈覺)의 무궁한 조화 능력은 천신(天神, 一신卽三 -이 '신'은 하느님 '신'자)과 그 근원을 같이 한다. 영원한 생명의 화신인 인간에게 본래 목숨인 삼신의 생명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자연의 산천과 그 기를 같이 한다. 또 인간의 정기가 자손에게 이어져 영원히 지속함은 창생과 천지의 이상세계를 이루어 가는 과업을 함께 하고자 함이다."

(性不離命 命不離性 吾身之性 與命 合而後 吾身 未始神之性 未始氣之命 可見矣. 故 其性之靈覺也 與天神 同其源 其命之現生也 與山川 同其氣 其情之永續也 與蒼生 同其業也)

 "이에 하나(하느님) 속에는 셋(삼신, 즉 덕과 혜, 그리고 력)이 깃들어 있고, 셋은 하나(하느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원리가 그것이다. '하나' 속에 '셋'이 있고 셋은 그 근본이 하나(一)속의 삼신(三神)의 조화이다. 그러므로 한마음으로 안정되어 변치 않는 것을 진아(眞我)라 하고, 신통력으로 온갖 변화를 짓는 것을 일신(一신, 하느님)이라 하니, 진아는 우주의 하느님이 거처하는 궁전이다.
 이 참됨의 근원을 알고 법에 의지해 닦고 행하면 상서로운 기운이 저절로 이르고 신(곧 삼신)의 광명이 항상 비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늘과 하나 되고자 할 때, 진실로 삼신의 계율을 굳게 지킬 것을 맹세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능히 이 하나 됨의 경지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乃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者 是也. 故 定心不變 謂之眞我 神通萬變 謂之一神 眞我 一神攸居之宮也 知此眞源 依法修行 吉祥自臻 光明恒照 此乃天人相與之際 緣執三神戒盟而始能歸于一者也)


 <단군세기> 서문의 이 부분은 '집일함삼(執一含三), 회삼귀일(會三歸一)' 이라는 우주구성과 인간 완성에 대한 해답인 <삼일신고(三一신誥)>의 불변의 진리를 간결하고도 간절하게 풀이한 인류 최고 수준의 철학 입문서이다.

 행촌 이암 선생의 가문은 이후로도 600백년이 넘도록 대대에 걸친 가학(家學)으로 이를 이어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와 민족의 위대한 정체성을 철학으로, 연대로 낱낱이 밝히고 있다. 고성 이 씨 13세손 이맥(李陌, 1455~1528)은 이암의 고손으로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저술한다. 27세손인 이기(李沂, 1848~1909)는 절세의 독립운동가인 계연수(桂延壽, 1864~1920)의 스승으로 우리의 바른 역사를 가르치고 제자가 <환단고기>를 저술 하도록 키운다. 생전에 <환단고기>를 세세히 감수(監修)한 이기 자신은 망국을 맞아 굶어서 자진을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30세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상해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이끈다. 35세손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은 평생을 춥고 어둡게 지내면서도 <환단고기>를 보존하여 이를 세상에 공개한다. 이로 인하여 근 조선의 중화사대 성리학의 폐쇄적 분위기 아래에서 그의 가문은 벼슬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행촌 이암선생을 필두로 고성 이씨 가문은 현실의 불리함을 떠나 몸과 마음을 바쳐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그 숭고한 뜻과 우리역사의 진면목을 이제는 국민 모두가 다 알아야 한다. 그런 뜻을 이은 유, 무명의 애국지사들이 고성이씨 만이 아니었음도 알아야 한다.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젠 나부터 이 거룩한 뜻을 이어가야 한다' 는 사명감을 마음과 몸으로 확실하게 각인해야 할 것이다.


사단법인 국학원 원장(代), 전국 민족단체 협의회 대표회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