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묘원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처음에는 효창묘라 하였다. 그 후에도 왕가의 묘를 몇 기 더 모셨고 1870(고종 7)에는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본래 효창원은 청파동과 효창동 일대의 수림이 울창한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 군대가 불법으로 주둔하면서부터 이곳을 훼손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일제 말기(19453)에 묘들을 서삼릉으로 강제로 옮기고 이곳을 효창공원으로 만들었다.

일본이 훼손한 또 한 곳의 역사현장인 것이다. 도대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남의 나라에 와서 마음대로 왕가의 묘를 이리저리 옮겨버리다니....... 다시는 남의 나라 손에 우리의 터전이 훼손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할 것이다.

▲ 효창공원에 조성한 삼의사 묘

  효창공원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를 모신 곳이고,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1949년에는 김구 선생의 유해도 모셨다. 삼의사 묘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를 나란히 모셨다. 삼의사 묘역 앞에는 1990년 순국선열 7위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를 건립하고, 이곳에서 매년 임시정부 수립일인 413일에 합동추모제를 지낸다.

광복 후 김구 선생이 맨 처음 한 일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들의 유해를 수습해 오는 일이었다. 독립투사들의 유해를 찾는 과정에서 그 얼마나 울분에 치를 떨었을까? 윤봉길의사는 나무 기둥에 무릎을 꿇여 총으로 살해했다.  그 나무 기둥을 관 속에 같이 묻은 것도 모자라 묘표도 세우지 않고 일본의 공동묘지 입구에 묻어놓아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해 놓았었다. 그렇게 악랄한 일본은 만행

 
을 저질렀다. 일본의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아직도 그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또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을지 분통하고 원통하다. 삼의사묘역에는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안중근의사의 가묘가 있어 우리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고 울분에 목이 메게 한다.

돌아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의 연이은 신사참배와 우경화목소리, 무엇보다 야스쿠니 신사의 신사가 멋진 남자, 잰틀맨의 신사로 알고 있고, ‘3.1운동은 북한이 쳐들어와서라고 말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있는 현실에 부끄럽고 참담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참담한 현실에도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을 찾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더욱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백범김구기념관으로 향했다.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 김구의 기념관이 2002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모습으로 개관했다니...

그동안 경제성장을 핑계로, 좌우이념의 대립으로 우리 역사에 대해 외면해 왔던 과거를 반성하고 늦게나마 이런 기념관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교차한다.

 

김구선생의 개구장이 아이의 모습부터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해온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신분제도를 알고부터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과거에 낙방한 후 관상공부를 하면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는 10대의 김구. 외세의 침략과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동학운동을 하고 민비를 시해한 일본의 군인을 처단하고 시련의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한다. 감옥에서 생활하는 동안 고뇌와 갈등이 있었다는 대목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책에서 몇 줄 나온 독립투사들의 이름을 보며 그분들은 원래 그렇게 용감했나보다 여겼지 그들에게도 인간적인 번뇌가 있었고 아픔이 있었음을 공감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1911년 서대문감옥에 수감 중일 때 나는 네가 경기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태연하게 말씀하셨다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보니, 자식을 키우는 같은 어머니의 입장에서 과연 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부끄러움과 감동에 눈물이 난다. 그 모진 고문을 당하고 차가운 감옥에 갇혀있는 아들을 보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보다 자랑스럽다는 말을 해 주는 어머니.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미국역사 가르치는 영어학원에 보내놓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돈 많이 벌고 성공하라고 닦달한 내 모습. 내 자식, 내 가족만의 성공을 위해 눈감고 외면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기념관을 돌면서 많은 사진을 봤지만, 온화한 미소를 잃은 단 두 장의 사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바로 어머니의 장례식 사진과 삼의사(三義士) 유해봉환식 사진이다. 그 사진을 보니 나라를 위해 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 왔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평범한 아들의 슬픈 얼굴이고,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를 봉환하는데는 동지를 먼저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의 아픔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광복이후에도 그는 쉴 수 없었다.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던 그는 결국 친일파 반통일 세력에 의해 서거하게 된다. 그 분이 마지막 순간까지 힘쓰고 소원했던 통일조국을 지금도 이룩하지 못한 후손으로서 또 한번 부끄러운 마음이다.

 

기념관을 나오는데 백범일지 발간사 중의 한 문구가 가슴에 박힌다.

"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이 되지 못하야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오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우리 민족의 훌륭한 독립운동가요 사상가였던 백범 김구. 이렇게 훌륭한 큰 스승이 있었음에 감사하고 그 분의 뜻을 이어 통일을 이룩하여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침 답사일인 54일은 숭례문 복구 기념식이 열리는 날이어서 회원들 모두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3월부터 매월 둘째 주 답사지로 서울 성곽을 탐방했는데 다음 주 답사지인 남산 성곽부분의 마지막 종착지가 될 숭례문이 이렇게 복구 되니 기쁨이 두 배이다. 항상 그 자리에 서있는 우리의 문화재인줄 알았는데, 그 문화재의 소중함과 역사를 알지 못하면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되새기며 화창한 봄날 그 어느때보다 나라사랑의 마음이 뜨거워진 답사를 마무리했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교육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