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에서는 네이버카페 '우바시'(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회원들과 함께 매주 역사유적지 탐방을 한다. 역사유적지 현장에서 생생한 우리 역사를 배우고 우리 문화의 뿌리를 확인한다. 유적지 탐방 답사기를 정리하여 게재한다. <편집자 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는 삼국 시대 치열한 격전지였으며 남한 최대 고구려 유적지인 아차산성을 4월20일 다녀왔다.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진행한 아차산행은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잘 조성된 산행길과 번잡하지 않은 분위기 덕분에 운치 있는 산행이 되었다. 역사 탐방이지만 항상 자연과 함께하는 여정으로 계획하므로 역사 공부도 하고 체력 단련과 힐링도 한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은 아차산 곳곳에서 초봄에만 볼 수 있는 분홍빛 진달래가 우리를 반긴다.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파랑새도 만나는 행운을 함께하며 아차산 제 4보루에 도착했다.
보루란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주로 산꼭대기에 만든 군사요새를 말한다. 한강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보루는 고구려 특유의 관방 시설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대규모 성곽을 축조하는 대신 소규모 관방 시설인 보루를 중심으로 방어체계를 형성하였다. 아차산에는 보루 20여 개가 있는데, 발굴 복원한 것은 제 4보루다.
제 4보루에 올라서니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탁 트인 조망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맑은 날에는 멀리 팔당까지 보인다고 한다. 흐린 날임에도 남쪽으로 잠실 일대와 특히 백제의 도성으로 알려진 풍납토성이 훤히 내려다 보여 이곳이 삼국 시대 전략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산성 사이로 피어오르는 운무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운데 치열했던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차산성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삼국 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둘레 약 1,125m이다. 아차산(阿且山: 아차산(峨嵯山))의 남쪽으로 경사진 산허리의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현재 동쪽과 서쪽, 남쪽에 문지와 수구터가 있다. 북쪽과 서쪽ㆍ동쪽 등 둥글게 돌아가는 곳마다 곡성(曲城) 겸 망루터가 있다. 일명 아단성 (阿旦城) 또는 아차산성(阿且山城),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으로도 불렀다.
축성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하였을 때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여 쌓았다는 견해가 있다. 산성은 표고 205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의 한강변 쪽으로 경사진 산허리의 윗부분을 둘러쌓았다. 규모가 매우 커 성내에 작은 계곡이 있다.
아차산성은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 남쪽에 있는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사적 제11호)과 함께 백제 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하처(渡河處)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중요한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아차산성은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군 3만 명에게 함락되었을 때 백제 개로왕이 전사한 곳이다. 이곳을 고구려가 차지하면서 수도 방비가 어려워진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한다.
또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재위 559∼590)의 사위 온달(溫達) 장군이 죽령(竹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 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아차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아차산 역사문화 홍보관'에 들렀다. 그곳에서 동영상을 보고 해설사의 상세한 해설을 들으니 아찬산의 역사가 어제 일인듯 생생해진다. 더불어 '아차산 자생식물관찰로'에서 한껏 봄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