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병록 작가의 작업은 곧 다가와서 지나갈 현재의 순간을 포착하여 수묵으로 화폭에 옮긴 기록이다. 미래에서 다가와 현재가 되고, 현재에서 머물다가 곧 과거가 되어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유병록 작가가 이런 작업을 하게 된 것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년 동안 병으로 인해 사망하기 전 도저히 영정 사진을 찍을 심정이 되지 않는 분들 대상으로 13명의 초상화를 수묵으로 그려 드리는 일을 진행하였다. 작가는 그 일을 한 후 생각지 않은 일이 생겼고 작업에도 변화가 있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겪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심정이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가며 예기치 못하게 소중한 무엇인가를 떠나보내고, 또 떠나보내는 일들이 발생하면서 그전에는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많은 것들이 나의 시선에 들어왔다.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으나 시선에 들어오지 않았던 주변의 소소한 풍경들, 인물들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수묵으로 완성된 내 작업은 기억의 파편과 조각면이 모여 기록되어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지나간 과거의 ‘포착된 순간’을 상기한다. 다만, 포착된 순간의 총 천연색이 사라지고 형태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맑은 먹부터 짙은 먹까지 농담으로 천천히 쌓아 올린 나의 기록은, 마치 시간이 지나 빛바랜듯한 느낌을 주는 흑백 사진의 그것과 닮아있다. 무심코 지나칠 당시에는 몰랐던 주위의 모든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모두 소중했던 순간이자 소중했던 대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사람, 주변 풍경, 계절 모든 것이 나의 피사체이자 기록의 대상이다. 모든 것들의 시간은 멈출 수 없고 결국 지나간다. 막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일 분, 일 초. 모든 것들은 흘러가고 과거가 되어 지나간다.
하여 총 천연의 색을 빼고 단색 화면으로만 기록된 나의 작업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애도(哀悼)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기록이다.”

이러한 작업을 인천 갤러리 오솔에서 7월 2일 개막한 유병록 작가의 개인전 《Recorded : 주변의 풍경》에서 볼 수 있다.
유병록 작가의 작업을 고경옥 홍익대 연구교수(미술비평)는 이렇게 소개한다.
“영정 그림을 제작했던 경험은 최근 10여년 넘게 함께한 자신의 반려견을 떠나보낸 일과 겹쳐지면서 그를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이때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일상에서 비근하게 만나는 꽃과 나무같은 식물이었다. 유병록은 비파, 국화와 같은 식물의 꽃과 열매, 그리고 이파리를 사진으로 촬영하고 이것을 다시 거대한 그림으로 재현한다.
작가가 선택하는 식물의 종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마치 일상을 기록하는 사진일기처럼, 우연히 작가의 눈길을 사로잡는 여러 식물과 꽃이 그림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식물의 변화무쌍한 과정이 아닌, 찰나와 같은 순간을 포착해 그림으로 그려낸다. 제작 방식은 앞서 설명했듯이 순지에 수묵을 활용하는 기법 그대로를 이어간다. 그리고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 혹은 삶의 궤적에 흔적을 남긴 지인의 얼굴도 하나씩 그려나간다.

이러한 작가의 그림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에 대한 애도처럼 보인다. 그것은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특정한 대상이기도 하다. 미술사에서 정물화(Still Life)의 유래가 바로 ‘바니타스(vanitas)’, 즉 누구나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의 식물 이미지와 인물화는 우리를 한없이 겸허하게는 성찰적 그림이다.
유병록은 먹을 사용하는 전통동양화 기법을 통해 동시대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나 영화 속 영웅 캐릭터와 같은 팝적인 이미지로 시작하였으나, 최근에는 식물과 사람의 얼굴로 그 대상이 변화하고 있다. 이때 그가 택한 극사실적인 재현은 ‘먹’과 ‘물’, ‘순지(한지)’라는 동양화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살린 방식이다. 먹의 중첩이 만들어낸 오묘한 흑백 이미지는 유화나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것과는 사뭇 다른데, 오히려 사실감을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동시에 마치 빛바랜 흑백 스냅사진을 보는 것처럼 기억의 아련함을 전한다.
사진 속 이미지 재현을 통해 망각에 저항하려는 정동과 기억의 그림들. 동양화의 전통적인 재료와 그리기 방식을 따르지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사진 같은 이미지를 재현하는 그의 독특한 그림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될지 기대된다.”

유병록 작가는 협성대학교 조형회화학과를 졸업하고, 세종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동양화 전공)를 수료하였다.
유병록 작가의 개인전《Recorded : 주변의 풍경》은 갤러리 오솔(인천 남동구 수현로 28-1 1층)에서 7월 28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