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 밥상
시인 조재도
안방이다
벽장문이 비젓이 열려 있는
퀴지근한 냄새나는 시골집 안방이다
암갈색 대 그림이 박힌 밥상에 둘러앉는다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말 못 하는 형이 함께하는 저녁상이다
아버지의 병환과
칠순 어머니의 고된 노역과
농협 융자와
문창을 할켜대는 장마철 비바람에
말 없는 초라한 볼품없는 저녁
이따금 후루륵 찌개 떠먹는 소리 들린다
국그릇에 수저 부딪는 소리 들린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환을 깊이 근심한다
아버지는 객지 동생의 실직한 생활을 걱정한다
나는 어머니의 고된 노역을 측량하고
그러면서 제각기 말이 없는 저녁
내 가슴에 진흙 덩어리 꽉 메이는 것 같다
눈에 눈물이 핑 고일 것도 같다
이렇게 갑갑하고 눅눅한 때를 당하면
화라락 문을 열고 뛰쳐나가 고함 고함을 지르고 싶다가도
잠 ― 잠 ― 히
또 세상일이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되지 않음을 생각하면
슬픔과 원망과 막 부쩌지 못할 불내 나는 마음이
어느덧 가라앉아 허공 중 한 점 티끌로 아슴아슴히 가라앉아
나는 차차로, 평온한, 좀 외로운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 것인데
만조의 일렁임이 휩쓸고 지나는 저녁
시지근한 냄새 배어도 있는 시골집 안방에
쩝쩝 밥 먹는 소리나 들리는
말 없는
초라한
볼품없는 밥상이다.
출처 : 조재도 시집 《그 나라》(세계사)에서.
■조재도 시인은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어려서 청양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 가 홍익중학교와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81년 졸업과 함께 대천고등학교에서 근무한 이후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에 이어 1989년 전교조 결성으로 두 차례 해직되었다. 1994년 복직 후 2012년 조기 퇴직하기까지 충남의 여러 학교에 근무하면서, 15권의 시집과 다수의 책을 펴냈다. 시인은 시간이 갈수록 사라져가는 농촌의 생활 문화와 정서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해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고향 시편’ 연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무리 기계문명의 시대를 산다고 해도 마음 깊은 곳에는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삶의 자취가 애틋하게 남아 있다. 조재도 시인은 이 연재가 앞서 살다 간 사람과 뒤따라 오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다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