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역사학자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는 지난 3월 2일부터 7일 5박 6일 일정으로 동해로 맞닿은 일본 서해안 고대 역사 답사를 떠났다. 고구려와 신라, 가야, 발해와 연관된 일본의 고분과 사찰 신사 등을 탐방하고 일본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일본의 고대 및 근대, 그리고 한일 역사 여행을 윤명철 교수와 떠나보자.

- 한반도 진출자의 짙은 흔적…가야 왕자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 신라왕자 천일창

쓰루가시 게히신궁 경내 안내도. 2025년. 게히신궁은 한일 고대 교류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쓰루가시 게히신궁 경내 안내도. 2025년. 게히신궁은 한일 고대 교류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일본 쓰루가의 게히신궁気比神宮에는 우리와 연관이 깊은 또 하나의 전승이 있다. 어쩌면 일본 고대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오진(応神)천황일지도 모르는 신라계 진출자인 신라 왕자 천일창(천일모)와 연관된 이야기이다.

712년에 망 백제계 유민세력인 ‘안만려’ 등에 의해 집필된 최초의 역사서 겸 신화서인 《고사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신라의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가 일본에 건너온 내용이다.

아구(阿具)라고 하는 연못 옆에서 한 여자가 낮잠을 자는데 햇빛이 비추고, 그녀는 임신을 했고, 붉은 옥을 낳았다. 이것을 본 한 남자가 붉은 옥을 달리고 해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

《고사기》에 등장하는 신라의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 천일창)신화. 사진 고사기 사이트(kojiki.138shinsekai.com) 갈무리.
《고사기》에 등장하는 신라의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 천일창)신화. 사진 고사기 사이트(kojiki.138shinsekai.com) 갈무리.

그러다가 그는 왕자인 아메노히보코를 만났는데,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진 끝에 결국은 붉은 옥을 아메노히보코에게 선물로 줄 수밖에 없었다. 왕자는 얻은 옥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는데 어느 날 옥이 아름다운 여자로 변신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결혼해서 살았다.

하지만 왕자가 어느 때부터인가 여자를 소홀하게 대했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여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는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나니와(難波, 오사카)로 왔다. 그러자 왕자는 배를 타고 그녀를 서둘러 쫓아 왔지만, 끝내 신의 허락을 못 받아 다른 곳에 상륙해서 살았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해모수 신화와도 유사한 점이 많다.

《일본서기》에는 이 일이 신라 왕자인 천일창(天日槍)이라는 이름이지만 조금 다른 내용으로 전해진다. 그는 원래 신라 왕자인데 스이닌 천황 때 동생에게 나라를 넘기고 7개의 보물을 갖고 귀화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7개의 보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나는 40여 년 전에 일본 학자 무재인남의 설과 나의 뗏목항해를 한 경험을 토대로 '항해 계기'들일 것이라는 주장의 논문을 썼다. 

무재인남은 천일창이 가져온 보물 가운데  청동거울에 양각된 12지신상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그것을 활용하면 항해방향을 알수있다고 주장했다. 그 밖에 천(옷감)은 바람의 방향을 관측하는 기능 등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도 뗏목으로 항해하면서 그런 것들을 실험했다.

경북 포항 영일만에 있는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사진 한국관광공사.
경북 포항 영일만에 있는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사진 한국관광공사.

그런데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린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이다. 필시 천일창은 오늘날의 포항시의 영일만인 근오기 지역에 살다가 일본에 어느 지역에 도착해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된 제사 집단인 연오랑과 세오녀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천일창(천일모) 설화는 한일 양국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신라와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게히 신궁 역시 천일창의 후손이라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것이다.

우리의 역사적인 자존심을 건드리고, 또 역사의 왜곡, 아니 내 관점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해석하는 신공 황후와 직접 연관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신공 황후는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지만, 소위 삼한정벌에 돌아온 후에는 아들(응신천황)을 쉬게 하려고 이 곳에 보냈다.

이 게히신궁의 신궁궁사기(神宮宮社記)에는 이 지역에서 하타(秦) 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타 씨는 교토 부근인 가쓰라 지역에 정착해서 개발한 일본 고대에 최대의 우지(氏)이다.

그는 동해를 건너온 신라계 사람으로서 ‘하타’는 우리말 ‘바다’에서 나온 것 같다고 작고한 김달수 선생이 기술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잘 알려진 인물인 하타노가와가쓰(秦河勝)는 성덕태자 시절에 오늘날의 광륭사를 짓고 국보 1호인 보관미륵반가사유상을 모셨다.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일본 광륭사에 있는 일본 국보 1호 보관미륵반가사유상은 이 금동반가사유상과 쌍동이처럼 닮았다. 사진 K스피릿 DB.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일본 광륭사에 있는 일본 국보 1호 보관미륵반가사유상은 이 금동반가사유상과 쌍동이처럼 닮았다. 사진 K스피릿 DB.

훗날 게히신궁은 고구려와 발해의 사신들을 맞이했고, 그들이 유숙하는 객관으로도 사용됐다. 발해인들은 727년부터 일본국에 사신을 파견했고, 926년에 멸망할 때까지 공식 사절단만 34회를 파견했다.

최초에는 주로 혼수 북부 해안에 상륙했지만,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많은 경우에는 이 월(越) 지역, 특히 쓰루가 지역에 상륙했다. 발해인들은 일단 도착한 다음에 일부는 현장에서 몇 달씩 머무르면서 장사를 하고, 나머지 일부는 수도인 나라와 헤이안으로 올라가서 외교 행위와 함께 무역을 했다.

그 엄청난 규모와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이 《속일본기》부터 계속 기록되었다. 그리고 발해 사신들은 귀환할 때는 이곳의 객관에서 머물다가 다시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즉 직접 동해를 건너 본국으로 귀국하거나 북쪽인 이시가와현의 노도반도 후쿠라 항으로 이동한 후에 출항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으로는 이 지역에 ‘신궁사(神宮寺)’가 있다는 점이다. 1982년도에 몇 사람들과 함께 방문했었다. 신궁사란 글자의 뜻 그대로 전통 종교인 신궁과 불교의 사찰이라는 다른 종교가 내용과 양식으로 한데 어우러진 것이다.

1982년 촬영한 신궁사. 토착신을 모신 신사 안에 세운 불교사찰.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1982년 촬영한 신궁사. 토착신을 모신 신사 안에 세운 불교사찰.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재래의 천신지기(天神地祇), 즉 토착신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신사에 부속으로 한 궁사이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오고 국가의 종교로서 공인을 받자 천황가는 점차 토착신들의 입장도 보장해주고, 그들의 지지를 계속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정치적으로 두 종교의 융합과 공존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신궁사라는 양식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신궁의 성격을 가진 사찰인 것이다.

이 와카사 히메(若狹比古)의 신궁사에는 지방호족의 우지가미(氏神)이며 지방의 수호신이 불도에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야마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장악한 호족이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카도카(角鹿)신사로 이동했다. 이름부터가 고대 역사와 연관 있음을 알려준다. 역 앞에 서 있는 무사 동상의 사연에서 이야기했지만, 쓰루가 시의 어원이 쯔누가인데, 이 카도카(角鹿)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는 정체성의 핵심이 깃든 장소이다.

각록신사 앞에 선 일본 서해안 고대 역사 답사팀.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윤명철 교수.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각록신사 앞에 선 일본 서해안 고대 역사 답사팀.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윤명철 교수.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게히신궁안에 있는 쯔누가(角鹿)신사.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게히신궁안에 있는 쯔누가(角鹿)신사.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나도 개인적인 추억 때문에 오랫동안 사진으로 기렸던 곳이다. 사당 앞에 서 있는 도리의 화강암은 여전히 당당한 힘을 내뿜고, 살짝살짝 묻은 이끼들의 녹청색들도 여전했다. 앞에 서서 길게 늘어뜨린 철방울인 ‘와니구찌(鰐口)’를 잡아 흔들어본다. 우리 종처럼 깊고 그윽한 울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신라나 고구려, 아니 발해신들이 마중 나올지는 모른다는 바램으로 손바닥을 모으며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뭔가를 빌고 빌었다.

천천히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타 그 근처인 마쓰바라로 갔다. ‘松原’ 즉 소나무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인데 일본의 3대 송원 가운데 하나라고 아름답고 특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발해사신단이 묵은 객관이 있던 마쓰바라 공원 안내비석(왼쪽)과 들어가는 입구(오른쪽). 2025년.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발해사신단이 묵은 객관이 있던 마쓰바라 공원 안내비석(왼쪽)과 들어가는 입구(오른쪽). 2025년. 사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여기는 발해인들이 묵었던 객관이 있었다. 부상략기 扶狀略記 라는 책에는 919년 12월 24일 조에 발해국 사신들을 위해 송원관을 지었다.(客狀申云, 遷送松原館 而閉門戶…)고 기록했다. 이것은 사실 이 지역에 도착한 발해인들과 이곳의 지방 호족이 사교역하는 것을 막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가치가 큰 무역을 정부가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여기에서 발해인들은 당나라 상인들을 만났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무렵에 발해는 이미 망국의 기운으로 흔들리는 중이었다.

잘생긴 소나무들이 양옆에 쭉 늘어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도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발해의 자취를 찾으려 고개를 기웃거리던 나는 안타까움을 누르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시간이 부족해 조구(常宮)신사에 걸려있는, 임진왜란 때 억지로 떼어져 여기까지 실려 와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종'을 못 보고 떠난다. 무엇보다도 내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던 여러 신라 신사들을 못 봐서 정말 마음이 안 좋다.

그래도 짧은 만남이었지만 참 많은 생각이 오갔고, 의미도 컸다. 언젠가 다시 방문하고, 그때는 야마구치를 찾아내 단 하루라도 자면서 밀린 우리들의 젊은 날들을 추억하고 싶다. 이제는 차가 시내를 다 빠져나왔다. 몇 시간 동안 신라의 자취를 찾아 파도가 출렁거리는 동해가를 달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