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정유재란(1592~1598) 7년간 전쟁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호국선열을 기리는 칠백의총(七百義塜)과 만인의총(萬人義塜)에서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를 거행한다.

올해로 430주년을 맞는 충남 금산군의 칠백의총 순의제향은 오는 23일 오후 3시 문화재청장을 비롯해 칠백의사 후손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지난해 열린 칠백의사 순의제향 행사모습. [사진 문화재청]
지난해 열린 칠백의사 순의제향 행사모습. [사진 문화재청]

이날 행사는 초헌관의 분향과 함께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례, 축관의 축문낭독,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례에 이어 제관 일동의 재배 순으로 진행된다. 초헌관은 책백의총관리소장이, 아헌관은 후손 대표가, 종헌관은 시민대표가 맡는다. 대통령 헌화와 분향, 묵념은 문화재청장이 대신하며,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의 살풀이춤 공연도 펼쳐진다.

칠백의총 순의제향 때 펼쳐질 국가지엉문화재보유자의 살풀이춤. [사진 문화재청]
칠백의총 순의제향 때 펼쳐질 국가지엉문화재보유자의 살풀이춤. [사진 문화재청]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선조25) 의병장 조헌과 승병을 이끈 영규 대사가 군을 합하여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하고, 8월 18일 생존한 700인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해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대군과 혈전을 치뤘던 곳이다. 전원이 순절하였으며, 접전 4일 후 조헌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시체를 거둬 하나의 무덤을 조성하였다.

칠백의총은 1603년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1634년 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제향을 올리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한 뒤 땅을 강제로 팔았던 아픈 역사가 있으나, 광복 후 국민 성금을 모아 1952년 재건했다.

지난해 전북 남원 만인의총에서 거행된 만인의사 순의제향. [사진 문화재청]
지난해 전북 남원 만인의총에서 거행된 만인의사 순의제향. [사진 문화재청]

한편, 올해로 425주년을 맞는 만인의사 순의제향은 오는 26일 오후 3시 전북 남원 만인의총에서 거행된다. 이날 후손들과 문화재청장을 비롯해 지역 국회의원과 전라북도 행정부지사, 남원시장 등 200여 명이 참석한다. 만인의사 순의제향은 칠백의총 제향과 같은 차례으로 진행되며, 남원시립국악단의 정화무 ‘지전춤’과 창작국악 ‘만인의 염원’이 펼쳐진다.

만인의사 순의제향에서 펼쳐질 정화무 '지전춤'. [사진 문화재청]
만인의사 순의제향에서 펼쳐질 정화무 '지전춤'. [사진 문화재청]

만인의총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 여 의사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무덤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을 점령하지 못한 것을 패인으로 판단한 왜적들은 11만 대군으로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해 우군은 전주성을, 좌근 5만 6천 명은 남원성을 공격했다.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 군사, 성민 6천여 명이 8월 13일~16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절했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성민들이 시신을 한 무덤에 모셨고, 1612년(광해군 4) 사당을 건립했으며 1675년(숙종 원년)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했다.

1871년(고종 8) 사우 훼철령에 따라 사당이 철폐되어 제단을 설치하고 봄, 가을로 향사해왔다. 그러나 일제가 제단을 파괴하고 재산을 압수하고 제사마저 금지했다가 광복 이후 다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