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胎)는 열 달 동안 어머니와 태아를 연결한 생명의 통로이자 보금자리로, 예부터 태를 중히 여겨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옛사람들은 태를 잘 처리하면 아기에게 복이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태를 태워 재를 작은 단지에 넣어 인적이 드문 산에 묻거나 깨끗하고 방위가 막히지 않은 방향을 가려 손 없는 곳 또는 맑은 물에 띄워 보냈다.

사도세자(장조)의 태실을 그린 '장조 태봉도' .  [사진 문화재청]
사도세자(장조)의 태실을 그린 '장조 태봉도' . [사진 문화재청]

하지만 왕실에서는 일반인처럼 태를 태우지 않고 흰 항아리에 담아 명당을 찾아 묻었다. 이는 왕릉을 조성하는 것만큼 중한 일로 여겼는데 태항아리를 묻은 곳을 태실(胎室) 또는 태묘(胎墓)라고 했다. 왕릉은 좌청룡 우백호를 갖추고 능선이 완만한 곳을 명당으로 여기지만, 태실지는 좌청룡 우백호를 갖춤은 물론, 반석처럼 반듯하고 우뚝 솟은 곳을 길지로 여겼다.

문화재청은 조선왕실의 태실을 그린 태봉도 3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고 지난 26일 발표했다.

보물로 지정된 태봉도는 제22대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태실을 그린 ‘장조 태봉도(莊祖 胎封圖)’와 제23대 순조의 ‘순조 태봉도(純祖 胎封圖)’ 제24대 헌종의 ‘헌종 태봉도(憲宗 胎封圖)’이다.

‘장조 태봉도’는 정조 9년(1785)에 사도세자(1735~1762)의 태실과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이다. 장조는 사후 추존된 칭호로, 당쟁 속에 불운하게 살다간 사도세자의 이름은 선(愃)이었다. 뒤주에 갇혀 죽은 그에게 영조가 시호를 사도세자로 내렸고, 1776년 왕위에 오른 아들 정조는 아버지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높였다. 1899년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했다.

장조 태봉도의 세부 모습. [사진 문화재청]
경북 예천군 명종사 인근 장조 태봉도의 세부 모습 1, 2 [사진 문화재청]

1735년 태어난 장조의 태실은 경상북도 예천군 명봉사(鳴鳳寺) 뒤편에 마련되었다. 그림 속 태실은 수많은 산봉우리가 에워싼 타원형 구도 안에 자리 잡았다. 멀리 상단에는 뽀족한 원각봉을 그리고, 가운데는 명봉사와 문종태실을 배치했다. 그 위로 사도세자의 태실인 ‘경모궁 태실(景慕宮 胎室)’을 그렸다.

그림 속 태실은 이중으로 된 연꽃 지붕이 있는 지붕돌에 팔각 난간석을 두르고, 앞쪽에 거북 받침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좌우 사방으로 활짝 펼친 듯한 구도에 주요 장소에 지명을 써 놓은 방식과 줄지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산들, 짙은 먹으로 거칠게 표현한 봉우리 등 지도식 표현이 두드러진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에 있는 '순조 태봉도'. 지도와 산수화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 [문화재청]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에 있는 '순조 태봉도'. 지도와 산수화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 [문화재청]

‘순조 태봉도’는 순조가 태어난 정조 14년(1790)에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안치한 순조의 태실 형상과 주변 지형을 그린 그림이다. S자 형태의 경계에서 오른편 위로 둥근 봉우리를 배치하고 그 위에 태실을 그리고 둥근 봉우리 주위에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아 태실이 돋보이게 했다. 그림 왼편 아래에는 여러 전각이 어우러진 속리산 법주사(法住寺)가 있다.

태실을 상세하게 묘사했는데 연꽃지붕이 있는 지붕돌을 얹었고 팔각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앞에는 거북모양 받침돌에 표석을 세웠다. 법주사는 중심법당인 팔상전을 비롯해 주변의 수정봉 거북바위, 문장대 등 속리산의 주요 경관을 알아보기 쉽게 묘사했다. 붉은 선으로 도로를 뚜렷하게 표시해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고, 점과 획을 반복해 무성한 나뭇잎을 표현하는 등 지도와 산수화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있는 헌종의 태실을 그린 '헌종 태봉도'. 전형적인 산수화 구도로 그렸다. [사진 문화재청]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있는 헌종의 태실을 그린 '헌종 태봉도'. 전형적인 산수화 구도로 그렸다. [사진 문화재청]

‘헌종 태봉도’는 헌종이 순조 27년(1827)에 태어난 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마련된 태실과 주변 경관을 그린 작품이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한 후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비석 등 석물을 새롭게 조성하는 의식인 ‘태실가봉(胎室加封)’ 당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태실 아래는 무성한 나무숲을 그리고 그 위 주위 배경은 여백으로 두어 태실이 돋보이게 했다. 태실은 연꽃지붕이 있는 지붕돌과 팔각 난간석, 거북모양 받침에 표석이 세워졌다.

특히, 헌종 태봉도는 전경(前景)과 중경(中景), 원경(遠景)의 구성을 적용한 전형적인 산수화 구도를 나타낸다. 전경에는 지붕이 보이는 마을이, 중경에는 수풀에 둘러싸인 태실을 가운데 배치했으며, 원경에는 봉우리와 멀리 보이는 먼 산을 간략하게 그렸다. 산봉우리를 현실감 있게 표현했고 부드러운 먹색으로 입체감을 나타냈다. 중간에 안개 낀 모습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태봉도 3점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지던 장태(藏胎)문화를 조선왕실에서 의례화함으로써 왕자녀의 태를 길지에 묻는 독특한 안태의례(安胎儀禮)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은 왕실 태실을 그린 태봉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역사성과 희소성이 높고, 제작 동기와 시기가 분명하며 태실 관련 왕실 회화로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한편, 〈민속으로 살핀 탄생에서 죽음까지, 사람의 한평생〉(정종수 저)에 의하면, 왕실에서 태항아리를 봉안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왕과 왕세자, 대군, 군, 공주, 옹주가 태어나면 즉시 태를 백자항아리에 넣어 산실 안에 미리 보아둔 좋은 방향에 안치하고, 3일 또는 7일째 되는 날 정결한 물로 씻는 세태(洗胎)의식을 했다.

길일을 택해 미리 길어놓은 물로 정성껏 백 번 씻은 다음 다시 향기로운 술로 한 번 더 씻어 미리 만든 작은 태항아리에 담고 기름종이로 항아리 입구를 막은 후 그 위에 푸른 비단을 덮은 후 빨간 끈으로 묶었다. 큰 항아리에 솜을 채워 작은 태항아리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입구를 봉한 뒤 뚜껑을 덮고 빨간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이중으로 봉한 항아리를 돌함에 넣어 태의 주인과 묻은 날짜를 쓴 지석을 석실에 같이 넣어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