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사람처럼 화선지 위에 그려댄다. 그리고 또 그려도 이 벅찬 가슴은 후련하지 않다. 담묵淡墨으로도 그려보고 초묵焦墨으로도 그려본다. 그래도 가슴만 터질 뿐, 독도를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안타까움을 어찌하랴, 독도의 흙이라도 발라 봐야지. 그 흙 그림 속에서 비로소 독도의 진경이 보이는 듯하다. 나는 경건한 자세로 '그림과 자연이 어우러짐'을 본다. – 이종상,'독도진경과 그날의 해돋이' 중에서 -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선생님의 정신세계, 예술혼은 무엇입니까?

예술은 깊이 들어가야 하니까 정신세계가 필요합니다. 일제 잔재가 지금까지도 한국 미술에는 남아 있어요. 한심하죠. 화가 납니다. 지금 저 벽에 걸린 <일월도>는 상당히 오래된 우리나라 채색화 기법이에요. 우리 기법인데 이 기법도 일본의 그림 기법으로 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요즘 사람들입니다.

수묵화는 중국에서 들어온 거죠. 조선 궁중화와 고구려 벽화, 고려 불화가 원래 우리나라 채색화입니다. 우리 자생문화죠.

분명히 알아두세요. 벽화 기법은 건식벽화 기법과 습식벽화 기법이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는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집 벽에 거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살고 있는 습도가 마땅한 곳에 걸어 놓는 그림이 아닙니다.

 

1999년 평양 덕흥리 고구려 벽화를 조사하는 모습 [사진제공=이종상]

우리 문화를 지켜야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에서 나를 부른 까닭은 내가 벽화를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벽화 기법을 처음으로 발표를 한 사람이어서였습니다. 3년 후에 동북공정이 일어나는데 도와 달라고.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벽화도 둔황벽화의 아류로 만들고, 거기 사는 우리 교민들을 전부 세계 각지로 다 뿔뿔이 흩트려뜨려 놓는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관광객들이 오면 "여기가 예전에 우리 땅이었어. 여기를 찾아야 돼"라고 아무 책임도 질 수 없는 얘기를 해요. 듣는 사람들이 다 있는데 뒤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럼 거기 남아 있는 교민들은 어떤 일을 당하겠어요. 

죽의 장막이 무너지자마자 내가 처음 갔을 때,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을 하는 사람인데도 나는 "여기가 옛날에 우리 땅이었다"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간 사람들에게도 신신당부를 했어요. "예전에 우리 땅이었다고 얘기하지 말고 실천을 해라. 어떻게 실천을 하느냐? 이걸 우리 자손들한테 가르쳐서 힘을 얻은 다음에 거기를 되찾아라. 이게 우리가 해야 될 일이다. 우리가 문화를 지켜야 된다. 문화를 지키지 않으면 문화가 없는 땅이 되고, 문화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 땅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이게 내 철학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약속을 해놓고도 아무리 눈치를 주어도 본 척도 안 하고 "여기가 옛날에 우리 고구려 땅이었어. 광개토대왕이 다 차지했었어." 그러는 거예요. 광개토대왕을 그린 나도 가만히 있는데, 문화영토확장론을 하는 나도 가만히 있는데 말입니다.

 

고구려 벽화는 음택지 기법, 둔황 벽화는 양택지 기법으로 서로 달라

고구려 벽화도 들어가 보고, 평양에 있는 강서대묘도 들어가 보고, 아직 수리도 안 해놓은 대묘들도 다 들어가 보았어요. 물이 줄줄 흐르고 아주 음습해요. 음택지라고 합니다. 무덤은 음택지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는 데는 양택지라고 해요.

그러니까 둔황의 벽화는 벽화 기법이 양택지 벽화예요. 양택지는 동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건조해서 벽화가 쩍쩍 갈라집니다. 가습기를 틀어 놓을 수 없으니까 수도승들이 굴을 파고 들어가서 그 습도를 맞춘 거예요. 거기를 다녀온 사람도 이걸 모릅니다. 나는 둔황 벽화 연구회 창립 멤버예요.

우리나라 벽화는 습도가 많은 무덤에 있었는데 물이 줄줄 흘러요. 그 물은 탄산수여서 석회암을 녹이며 방울방울 떨어져 고드름처럼 종유석과 석순을 만듭니다. 그 하얀색 물이 흘러내리니 그림을 다 덮게 되겠죠. 그런데 지금도 들어가 보면 석회석이 녹아서 떨어져 그림이 안 보일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어느 벽화도 덮여 있지 않습니다.

 

석회물로 코팅한 고구려 벽화는 천년이 가도 그대로 남아

얼마나 우리 고구려 사람들이 과학적인지 아셔야 됩니다. 봉분에서 물이 떨어지면 그림 위로 물이 흐르지 않도록 뒤쪽에 골을 해놨어요. 물이 그 골을 따라가면서 내려가요. 쭉 흘러내려오면 흰 줄이 생기다가 나중에는 덮여버려요.

무덤 벽이 차니까 습기가 찼다가 증발하고 이게 수십 년 되풀이되면 고여있는 그 석회석 물이 벽화를 코팅해요. 기가 막히죠. 일단 코팅을 하면 그 벽화는 천 년이 가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미 벌써 코팅하는 방법까지 우리 고구려 화가들은 알고 재료기법을 만들었어요. 이들은 화가이면서 보존 과학자예요. 지금 미술대학에서는 이런 재료기법을 전혀 가르치지 않아요. 내가 한때 서울대학에서 재료기법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애들을 환쟁이 만들려고 재료기법을 가르치느냐고들 했어요. 내가 이 재료기법을 얘기해줘야 오래가는 그림을 그릴 거 아닙니까.

 

형상의 관상학

그래서 무슨 채색을 썼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걸 '겹의 미학'이라고 그래요. 해안 지대에 가면 조그만 섬, 독도 같은 데가 올라와 있잖아요. 옆의 섬은 크고 한쪽은 바위 하나만 올라왔다고 무시하면 안 돼요.

그 바위 밑이 더 큰 섬일 수도 있습니다. 높지만 않을 뿐이지 물이 모두 빠지고 나면 큰 섬 같이 보였던 것은 아래가 기둥처럼 좁은데, 조그마하게 삼각형으로 나온 바위는 피라미드처럼 훨씬 더 큰 섬이 되는 거예요. 바닷물로 가려져 있으니까 모르는 거죠.

저는 '형상의 관상학'을 배웠기 때문에 바로 압니다. 초상화를 그릴 때, 뒤통수 쪽을 가보지 않아도 '뒤통수에 흉이 있겠구나, 뒤통수가 납작하겠구나, 뒤통수가 없겠구나, 짱구겠구나' 하는 걸 다 알죠.

 

위에서 입체로 볼 수 있는 눈

어떻게 알까요? 위에서 입체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겁니다. 산수화를 그리는 동양화가가 산의 뒤가 안 보인다고 그리지 않는 산수화를 그렸다? 그건 환쟁이예요. 사진이나 그렇거든요. 사진은 뒤를 못 찍죠. 제대로 그리는 화가는 뒤를 넘어가 보지 않았어도 앞 선을 보고 뒤를 생각하면서 '야, 뒤도 상당히 멀겠구나. 두텁겠구나'를 바로 압니다.

조선 왕조가 하필이면 삼각산 밑에다 자리해 이조 500년간 떠나지 못하고, 또 청와대도 해방 후에 계속 거기 있습니다. 세종시로 간다고 하면서도 일부만 가고 대부분은 그대로 있어요. 왜 그럴까요? 난 형상에 대해서 굉장히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풍수와 관련한 말씀인데 어떤 형상이 길하지 않은가요?

예를 들어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마주 붙여서 기도할까요 아니면 두 손등을 마주 붙여서 할까요? 두 손바닥을 마주 붙이죠. 왜 그럴까요? 다른 손 모양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하지 않을까요?

어디 가서 집을 사더라도 앞집 지붕의 형상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내 아이의 공부방을 열면 보이는 앞집 지붕이 가운데로 모였느냐 아니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느냐가 중요해요.

앞집 지붕이 서로 등지고 갈라져 있으면 그 아이는 배신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 형상을 항상 보여주면 등지는 겁니다. 어머니를 배신하고, 결혼해서 배우자가 들어와도 배신하고. 은연중에 서로 등지고 배척하는 걸 자꾸 보니까 그 둘 사이가 서로 등지고 갈라지는 겁니다.

그럼 그쪽으로는 창문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저 먼 산을 보니까 두 산이 서로 바깥으로 벌어져 있다면, 절대 거기로는 이동도 하면 안 되고 내다보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도 배신자 자리라는 겁니다.

 

모든 색에는 뜻이 있고 맛이 있다

미술을 가르치면 색깔이 의미하는 게 있습니다. 의미가 다 달라요.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의미가 다 다릅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있고. 의롭다 하면 의義만 생각해요. 나는 의롭다 하면 백색이 생각납니다. 모든 색이 다 뜻이 있고 맛이 있어요. 믿을 신信 자는 가운데 중앙입니다.

사군자 매난국죽이 있죠. 마지막 오군자가 소나무예요. 소나무는 임금입니다. 나무들이 가진 모든 조형미를 소나무에서 찾을 수 있어요. 대나무처럼 직선도 찾을 수 있고, 난초처럼 곡선도 찾을 수 있고, 반 곡선, 반 직선이 다 있는 게 소나무예요. 그걸 다 갖춘 게 임금입니다.

 

임금은 공간으로는 중앙, 시간으로는 지금

임금은 어디에 앉아요? 중앙에 앉는 거예요. 임금을 시간으로 따지고 보신 적 있습니까? 현재입니다. 지금 당장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내일 줄 게, 모레 줄 게. 내일부터 잘할 게. 소용없어요. 지금이 중요한 겁니다. 지금 왕이 되느냐 안 되느냐지, 내일 왕 될 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인의예지신도 저마다 색깔이 있고, 도덕이 있고, 윤리가 있고, 시간이 있고, 계절이 있습니다. 그러면 산을 봐도 풍경을 봐도 모두가 다 입체적으로 보이겠죠. 그래야 그림도 감상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껍데기를 보고 감상하고 더군다나 거기다 투자를 해요. 헛투자하는 겁니다.

인문학적인 사고와 과학, 시서화의 일치가 돼 있지 않으면 그림 그리지 말아야 해요. 그림만 보아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풍수학자구나.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앞만 보지 않고 뒤도 보고 연구한 사람이다. 이 화가는 통섭이 돼 있다. 문학, 철학 모두 배운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품과 작품이 기신起信 사상처럼 통섭을 하고 어우러져야

작품과 인품, 인품과 조형예술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굳이 얘기한다면 인품은 보이지 않으니까 형이상학적인 거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이하학적인 것은 속이 비었든 아니든 꼴값을 하는 거예요. 눈에는 보이는 것입니다.

인품과 작품 두 가지 중 하나는 형상은 있으나 속이 빌 수가 있고, 하나는 속은 꽉 차 있으나 겉을 맞추지 못해서 속을 알 수가 없죠. 이 둘이 통섭을 하고 기신起信 사상처럼 서로가 같이 어우러져야 되는 겁니다.

우리 정치가 잘 되려면 보수 따로 진보 따로 해서는 안 돼요. 그러면 우리나라 망합니다. 다 망해요. 진보도 망하고 보수도 망하고 둘 다 망해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철학을 안 배워서 그럽니다.

내가 자생미술이나 찾고 외치고 돌아다니고 옛날 그림이나 그리면 시대 감각이 없어서 금방 망해요.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100년 뒤에 유행할 그림이라고 하면서 미국 그림이나 흉내 내고 있으면 그것도 잘못된 겁니다.

 

인간이 돼 있으면 누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

예술뿐만이 아니고 남이 보면 아주 하찮게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 지게질을 한다, 길거리에서 번데기 장사를 한다. 그 번데기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엄청나게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봤어요.

그런데 자기가 벼슬 좀 했다고 우쭐대고. 그런 사람이 나라를 다 망쳐놓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인간이 돼 있으면 하찮은 일용직 노동을 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정치적인 마인드를 갖고 데모하지 않아도 일본인들이 지금 독도를 아무도 못 그리잖아요.

 

국내 최초 독도 화가로 독도문화심기운동을 전개하고, 작년 12월에는 독도평화대상 특별상도 수상하셨습니다.

서울대 박물관장 시절에 최초로 독도전을 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를 때 일본에 가서도 수없이 독도 그림을 그렸어요. 한국에서 제일 큰 수묵으로 그린 독도 그림이 고등검찰청에 걸려 있어요. 일본인들이 와서 보고 놀라는 거예요.

그러다가 여성용 독도 스카프를 만들어서 팔아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도쿄 신주쿠에 가서 판매를 했는데 한 장에 35만엔이나 하는 스카프가 매진이 된 겁니다. 독도를 팔아먹은 사람이 된 거죠.

정치가 천 명이 일본 사람들 독도 외치지 말라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근데 나는 어디서 돈이 나서 독도문화운동본부 활동을 하고 독도를 수십 번이나 갔느냐? 일본 여인들이 스카프를 사간 돈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화로 만들어서는 얼마든지 삼천리강산을 팔아도 좋다는 겁니다. 백두산도 팔고, 서울도 팔고, 금강산도 팔아라. 팔아서 번 그 돈으로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산업도 일으키는 거예요. 문화의 생산성이란 그렇게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가 있습니다.

그건 문화로 재창조한 거니까 얼마든지 또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문화를 심은 겁니다. 문화를 지킨 겁니다. 이게 독도문화심기운동이고,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이에요. 자기 전공이 뭐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이종상, 독도 - 기氣 II, 1982, 순지純紙에 수묵, 89x89

서대문의 동북아역사재단 입구에 내 암각화 독도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70년대에 그린 독도 그림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그걸 보고 확인하고 가는 거예요.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암각화는 전국에서 모인 어린이들과 합작한 작품입니다. 반구대 암각화처럼 돌에다 암각화를 팠죠. 그게 오래가죠.

그럼 세상에 이제 나는 없고 아이들이 크면 내 뜻을 알게 될 겁니다. 문화를 심은 거죠. 아이들과 합작으로 하며 그들에게 독도의 문화를 심었으니 그걸 지키려고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굉장히 애착을 가지고 지키려고 할 겁니다.

일본이 독도와 후지산 두 개를 일본의 유명한 우키요에浮世繪 판화기법으로 엄청나게 찍어서 전 세계 일식당에 나란히 붙여 놓기로 했다고 일본 화가가 알려주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막느냐고요. "그래? 하면 다 허풍되는 거지 뭐. 하라고 해. 울릉도 독도박물관 쇼케이스에 77년도 내 도록이 있으니까."

거기에 흑백사진으로 내가 그린 작품을 펴놓고 그 밑에 최초의 독도화가라고 써 놓았습니다. 일본 상원의원이 그거 보러 울릉도에 오는 거예요. 우리나라 언론들은 그 사람들이 독도를 다 가본 줄 알아요.

천만에요. 그 사람들은 독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울릉도에 가서 자기네들이 그런 큰 계획으로 전 세계에 독도와 후지산을 그려서 뿌리려고 하는데, 정말 독도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울릉도를 온 거예요. 근데 울릉도를 가려면 어렵잖아요. 그래서 어렵지 않게 해 주려고 동북아역사재단이 서대문에 독도박물관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문화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서 내가 뭘 하겠어?" 그러잖아요. 사람이 돼 있고, 문화가 돼 있으면 그 힘은 어떤 완력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4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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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일랑 이종상 화백(2) "우리나라가 한恨의 문화라는 건 일본 야나기 무네요시 미학론의 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