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랑 이종상 화백(4) "앞과 뒤, 겉과 속이 같은 우리의 스크린 문화"
[인터뷰] 일랑 이종상 화백(4) "앞과 뒤, 겉과 속이 같은 우리의 스크린 문화"
  • 안진경 기자
  • gnana7720@gmail.com
  • 승인 2022-02-03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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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만이 가진 특성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이화정신 홍익정신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면 모두 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온돌 문화, 전 세계에 온돌 문화는 우리밖에 없어요. 북방에서 내려온 겁니다. 그리고 김장 문화도 역시 우리밖에 없어요.

'스크린 문화'를 아시나요? 미국에 잠깐 유학 갔다 온 제자 녀석이 "선생님,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요"라고 해요. "왜?" 자기가 방에 있는데 아버지가 노크도 안 하고 툭 문을 연대요.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아직 멀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건주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야, 이 녀석아! 니가 아직 멀었다! 아버지가 밖에서 문을 열 때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네가 들었어야지. 발자국 소리를 들었어야지." 제자가 못 들었다고 하죠. 그럼 왜 못 들었겠냐는 거예요. 유리창으로 막았거나, 두꺼운 합판으로 두 겹 막았거나, 또 공기 들어올 만한 데는 꽉 막아서 내외가 소통이 안 되게 했거나. 그렇게 만든 집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노크 없이 노크 효과를 내는 우리의 스크린 문화

이게 우리 풍습입니까? 이건 우리 풍속이 아니에요. 우리가 무식해서 노크를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노크가 필요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이걸 알고 홍익인간을 얘기를 해야 됩니다. 아주 원시적인 것 같죠? 아니에요. 매우 앞선 서양문물보다 더 앞서가 있는 겁니다. 노크 없이 노크 효과를 내는 거. 그게 스크린 문화입니다.

옛날에는 영화를 상영할 때 깜깜한 방에서 앞에 관객들이 있는 쪽에서 광목에 빛을 비추고 그 밑에 우리들이 앉아서 스크린을 보았어요. 어렸을 적 기억이 나요.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극장 저 위에서 빛이 나가 스크린을 비추죠. 결국은 지금도 옛날과 동네에서 보던 것과 같은 방법이에요. 앞에서 비추고 앞에서 보는.

그게 말하자면 편협하다는 겁니다. 앞 다르고 뒤 다르고. 욕 중에 제일 나쁜 게 앞 다르고 뒤 다르다는 거죠. "저 친구 절대 가까이하지 마. 앞 다르고 뒤 달라. 속 다르고 겉 달라." 그 소리 듣고 싶어요?

우리 동양화는 앞 다르고 뒤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케이스를 두껍게 했어도 앞 다르고 뒤 다르지 않아요. 표구하기 전에 뒤집어보면 앞과 뒤가 똑같아요. 스미고 번지는 종이에다가 수없이 겹겹이 싸서 그래요.

[사진=김경아 기자]
[사진=김경아 기자]

앞과 뒤가 같은 기법이라야 훌륭한 필치

앞서 섬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아 보이는 게 더 클 수 있다고. 수면 밑으로 계속 내려보내요. 대륙붕에 가서 닿아야 하니까. 떠있는 뗏목이 아니잖아요. 내 그림이 저기 떠있는 뗏목입니까? 아니죠. 바닥의 대륙붕이 올라온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려니까 뚝방을 쌓듯이 수없이 밑을 채워야 합니다. 밑을 채우면 위는 조그만 돌멩이 하나만 올라가도 그게 훌륭한 필치筆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면 시간 걸려, 돈 들어, 채색 들어. 안 되겠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뗏목처럼 그립니다. 뗏목 그림. 어떤 게 더 값 나가겠어요?

우리나라의 장지화 기법이 겹의 미학이라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수묵화도 바로 그거예요. 표구사에서 앞뒤를 잘못 뒤집어서 배접해 와요. 앞과 뒤가 똑같아요. 우리 그림의 특징입니다. 그런 인품 갖고 싶지 않으세요?

이게 미대에서도 안 가르치고 점점 사라지는 채색화 기법이에요. 근데 일본인들한테 배운 일본 채색 기법, 서양 문화를 배우고 와서 우리나라 동양화 채색을 가르치는 겁니다. 나도 그렇게 배웠어요.

이건 망조예요. 서양화는 화이트를 칠하고 뒤집으면 뒤는 그냥 시커먼 천입니다. 그리고 화려한 걸 앞에다 그렸어요. 서양화 기법은 가까이에서 보면 안 됩니다. 앞 다르고 겉 다르고 속 다른 거예요.

 

대마도에 우리나라 채색화 기법 남아있어

우리나라 채색화 기법 그러니까 고구려 벽화와 고려 불화와 조선의 궁중화에 내려오는 그 기법이 장지화 기법입니다. 그래서 종이 紙자에 장할 壯자를 쓰는 거예요. 이걸 미대에서도 못 가르치고 아무도 모르니까 일본식 벽화 기법을 자꾸 가르치는 겁니다. 이제 이걸 끊어버리고 우리의 고유한 자생문화를 살려야 합니다.

지금은 일본 땅이지만 옛날에 우리 땅이었던 대마도가 있어요. 대마도 화가들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채색화 기법이 있습니다. 거기 오래 산 원주민 그림이 내 그림 기법과 같아요. 가서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우리가 대마도도 되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문화가 지금도 있어요. 찌안集安에도 우리 문화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 민족을 자꾸 이주시키는 거예요. 이걸 정신 차려서 바로 알려야 합니다.

 

"우리 미술에 숨어있는 조형성을 살펴보면 꾸밈이나 가식성假飾性이 배제되고 허세虛勢를 부리지 않으며 물질적이기보다는 이념적이며 겸허謙虛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조형적 요소가 직관성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골격미骨格美를 강조하고 정적인 형식 속에 동적인 내용을 조화시키려는 2중적 구성이 지배적이며 검소儉素와 축약縮約을 추구한다. - 이종상, '디자인 개념에서 본 예술과 과학' 중에서 -"

 

당진에 있는 가톨릭 신리성지에도 많은 작품을 기증하셨는데요.

어머니가 천주교 신자이셨는데, 아주 어려서 3살 때 장난치면서 놀면 "저 바로 앞 한 동네에서 400명이나 순교한 신리 동네가 있는데, 넌 밤낮 거기를 내려다보고 놀면서 어떻게 의젓잖은 짓을 하느냐"라고 혼이 많이 났어요. 그래서 그 신리를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또 대학교 때는 제가 못난 짓을 하면, 아버지께서 “너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곳에서 자란 놈이 왜 이렇게 못난 짓을 하냐”라고 하시는 거예요. 윤봉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윤봉길 의사도 좋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고문이 되어 있습니다. 윤봉길 기념관의 양쪽 큰 대벽화도 제 그림이에요.

 

훌륭한 자생문화를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우리나라의 그림은 깊이가 있고 자생문화가 훌륭한 문화입니다. 그 문화를 오래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최초로 기독교가 들어오고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솔뫼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신리는 그 이웃동네예요. 내가 태어난 곳에서 빤히 보이는 가까운 들판인데 그 경계가 당진이에요. 나는 예산 출신입니다.

그래서 참 인연이 무서운 겁니다. 안 사람은 내가 태어난 고향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근데 어디를 자꾸 가서 기부를 하고 봉사를 하고 와요. '충청도면 내 고향인데 도대체 이 사람이 충청도 어디에 가서 봉사를 하고 이렇게 밤늦게 오나' 했어요. 항상 대모님하고 혜화성당 교인들과 같이 갔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생각했죠.

그래서 운전을 해 안 사람이 가는 데를 한 번 같이 갔습니다. 그랬더니 글쎄 우리 어머니가 밤낮 이야기하시던 그 신리에요. 목 없는 시체가 즐비해 있던 곳. 거기를 가서 안 사람이 오랫동안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고향과 이웃한 순교지로 이끌린 운명

그러니까 아무래도 신이 있으신 것 같아요. 어떻게 거기를 내가 가게 만들었는지. 가보니까 묘지나 있지 아무것도 와서 볼 만한 뭐가 없었습니다. 그럼 순교해서 돌아가신 분들의 이야기는 어디로 갑니까? 일일이 신부님이 얘기하고 수녀님이 얘기를 하는데, 수녀님마다 다른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작은 동네에서 다섯 성인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늙기 전에 400명의 순교자 이야기를 조사해서 역사 고증을 받아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한 겁니다.

그림 하나가 천 호짜리 크기였어요. 천 호 크기면 일반 대문 네 짝 크기만 해요. 엄청나게 크죠. 그렇게 큰 대작을 파주에 화실을 얻어서 4년 가깝게 작업을 했습니다. 안 사람도 그림 그리는 사람이니까 곁에서 도움을 많이 주었죠.

만 4년 동안 다섯 성인의 영정을 그렸어요. 한 사람의 영정만 그려도 입원하던 내가 다섯 분을 모두 그릴 때까지 입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천 호 크기의 그림 13점을 그려서 증정을 한 거예요.

 

출처=신리성지 홈페이지

카타콤베식 미술관을 지어서

카타콤베라고 들어보셨죠?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절에 지하 동굴에 들어가서 몰래 예배를 보고 그랬습니다. 미술관은 카타콤베식으로 하자고 했어요. "이곳은 들판에 2층 집 하나 없는데, 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미술관이라고 높은 건물을 지으면 나는 싫다." 처음에는 서울 명동성당 지하에 그걸 하려 했는데 서로 마음이 안 맞아서 못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내 고향에 하자. 김원이라는 유명한 건축가에게 지하에 카타콤베 방법으로 설계하고 가장 위에 탑만 하나 나오게 해서 잔디로 덮으라고 했어요.

언제 기회가 되시면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종교 관계없습니다. 종교가 뭐라도 괜찮아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 성지입니다. 종교 다 떠나서 종교가 없어도 꼭 한번 가보세요. 스님도 오시고 그럽니다. 스님도 순교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차돈 미술관이 있습니까? 없죠. 화가들이 잘못하는 겁니다. 그게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선배님들이 내가 하라고 그걸 아직 안 하셨는가 보다. 그분들 원망할 수는 없어요. 내가 하자.

 

끝으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

전공이 크고 작고, 전문가고 기술자고 이런 거 없습니다. 뭘 해도 전부가 다 똑같습니다. 아주 훌륭한 일이고 꼭 그분이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해야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런 게 전공입니다. 먹고 노는 것만 아니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크게 할 일이 다 있어요.

그게 제가 얘기하는 "작품이 인품"이 갖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진실되게 충심을 다해서 인문학적 소양과 기예적 능력을 기르고 서로 융합을 해야 고부가가치 창출을 하는 21세기를 우리가 살아갈 수 있어요. 이걸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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