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순국 제78주기 추모식 25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
홍범도 장군 순국 제78주기 추모식 25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1-10-24 1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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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봉환 이후 첫 추모식 거행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 이하 ‘보훈처’)는 홍범도 장군 순국 제78주기 추모식이 10월 25일(월) 오후 2시 30분, 국립대전현충원(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국가보훈처는 홍범도 장군 순국 제78주기 추모식이 10월 25일(월) 오후 2시 30분, 국립대전현충원(독립유공자 제3묘역)에서 거행된다고 밝혔다. [포스터=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는 홍범도 장군 순국 제78주기 추모식이 10월 25일(월) 오후 2시 30분, 국립대전현충원(독립유공자 제3묘역)에서 거행된다고 밝혔다. [포스터=국가보훈처 제공]

 

서 거행된다고 밝혔다.

이번 추모식은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지난 광복절에 고국으로 돌아와 안장된 이후 처음으로 열린다.

이번 행사는 ‘영웅이 있었다, 대한이 이겼다’라는 표어로 코로나19 방역대책을 수립한 가운데,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우원식, 이하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거행한다.

추모식에는 황기철 보훈처장, 우원식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유족, 기념사업회 회원 등이 참석하여 국민의례, 헌화·분향, 추모사, 대한독립군 유고문 낭독, 소설 ‘나는 홍범도’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 순으로 진행된다.

특히, 소설 ‘나는 홍범도’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기념하고자 올해 처음으로 개최한 것으로 대상 1명과 최우수상 5명, 우수상 20명을 각각 선발했다.

추모식 이후 진행되는 ‘독립전쟁 청산리대첩 전승 제101주년 기념식’은 기념사, 기념공연, 독립군가 제창 등이 이어질 예정이다.

황기철 보훈처장은 추모사를 통해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이신 장군님께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바치며, 앞으로도 나라를 되찾고 지키고 바로 세운 분들의 뜻을 국민과 함께 계승·발전시키겠다”라고 밝힐 예정이다.

한편, 기념사업회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귀환으로 독립전쟁 승리의 역사를 당당히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라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쓰려져간 독립군 무명용사들과 함께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도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전했다.

 

홍범도 장군의 공훈은 다음과 같다. 

여천 홍범도 장군(1868. 8. 27~1943. 10. 25)은 평안북도 자성(慈城, 일설에는 평안북도 양덕(陽德) 또는 평양이라고도 함)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국권 침탈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고, 다음 해 부하 박영신(朴永信)에게 함경북도 경원(慶源)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하여 감산ㆍ혜산ㆍ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압록강 건너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 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 단체가 흑룡강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 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

1921년 러시아령(領) 자유시(自由市, 스보보드니)로 이동하여 수랍스카 부근에 주둔하여 레닌 정부의 협조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 양성에 힘썼으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 해제와 독립운동 진영 간 군권 다툼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겪고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어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후 전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국민 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한 공적으로 202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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