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국학원(원장 이승희)이 지난 10월 8일 오후 1시 전북 익산 왕도미래유산센터에서 “백제 익산미륵사지9층석탑의 가치와 선불습합문화”를 주제로 제4회 정기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전북 익산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 있는 익산미륵사지9층석탑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불교 석탑이다. 이 미륵사지석탑은 2001년 본격적인 해체작업을 통하여 무왕 39년 서기 639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 세운 가장 오래된 탑으로, 국보 제11호이다. 이 미륵사지석탑이 복원작업을 시작한 지 19년 만인 2019년 4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어 관심을 집중시켰다.

전북국학원이 지난 10월 8일 오후 1시 전북 익산 왕도미래유산센터에서 “백제 익산미륵사지9층석탑의 가치와 선불습합문화”를 주제로 제4회 정기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진=전북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전북국학원이 지난 10월 8일 오후 1시 전북 익산 왕도미래유산센터에서 “백제 익산미륵사지9층석탑의 가치와 선불습합문화”를 주제로 제4회 정기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진=전북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백제에는 불교가 침류왕 때인 384년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 인도-중국을 거쳐 전래되었다고 한다. 마라난타는 전남 영광 법성포 쪽으로 처음 도착하여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가 삼국시대에 전래되었을 당시에 이미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등 국가에는 불교 못지않은 수준 높은 사상과 철학이 발달해 있었다. 이를 선도, 신도, 신선도 또는 풍류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선도에서 비롯된 가장 대표적인 가르침이 신라의 화랑도이다. 백제에는 무절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고구려와 신라와 마찬가지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자, 이미 존재했던 선도와 융합과정을 거쳤다. 즉 기존의 사상체계인 선도(신선도, 풍류도)는 불교를 완전히 그대로 흡수하지 않고, 약간 변형된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불교 문화에 기존의 신선도문화가 많이 섞여 있으며, 이는 형이상학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 보이는 문화에서도 남아있다. 이를 통상 선불습합 문화라고 한다.

전북국학원이 개최한 제4회 학술회의에서 이찬구 박사가는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주제로 발표 했다. [사진=전북국학원 제공]
전북국학원이 개최한 제4회 학술회의에서 이찬구 박사가는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주제로 발표 했다. [사진=전북국학원 제공]

익산 미륵사지석탑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한민족 고유의 선도문화에서는 숫자 3, 9를 매우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탑도 3층, 9층 석탑을 선호했다. 숫자 5도 성수 중의 하나로 여겼다. 현재는 허물어져서 6층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원래 익산미륵사지석탑은 9층 석탑이다. 그리고 미륵사에는 총 3개의 탑이 있었다. 지금의 미륵사지석탑은 서쪽에 있었던 탑이다. 현재 동쪽 탑도 복원하였다.

백제의 석탑은 1사 1탑이 백제의 일반적 가람 배치인데, 미륵사의 석탑 배치는 3탑이다. 이 또한 선불습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3탑이면서 9층으로 된 탑은 바로 3수, 9수를 좋아했던 한민족 고유의 수리문화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전북국학원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서 백제 불교와 신선도 습합문화와 함께 미륵신앙을 살펴보고,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미륵사지9층석탑의 가치를 함께 확인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날 이찬구 박사는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주제로 발표를 했다.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 해발고도 430m의 미륵산 아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역을 자랑한다. 미륵사지는 미륵사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미륵사는 미륵사지의 중심 사찰이다. 미륵사지 절터에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가 있다.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3년 절터 주변에 흩어진 옛 석재들을 일부 재사용하여 동탑(東塔)을 복원하였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 600~641) 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미륵사는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이른바 백제식 <1탑-1금당> 형식의 가람 세 동을 3곳에 나란히 병렬시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양쪽의 동원(東院)과 서원(西院)보다는 가운데 중원(中院)의 면적과 금당 및 탑의 규모가 더 커 중심을 형성하였다. 이를 <3탑-3금당>이라고 한다.

이 중에 주목할 것은 서원(西院)의 미륵사지 석탑(또는 西塔)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무왕 대에 건립한 탑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 창건시기가 확실하게 밝혀진 석탑이다. 창건 시기는 639년으로 가장 이르며 규모로도 최고(最高)의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형(始原形)이다. 석탑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으로 되어있다.

이찬구 박사는 미륵사지 석탑은 황제사상, 성(聖)사상, 신선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했다. [사진=전북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이찬구 박사는 미륵사지 석탑은 황제사상, 성(聖)사상, 신선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했다. [사진=전북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미륵사지 석탑에서는 금동사리호가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금동제사리호를 비롯한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 다양한 종류의 사리장엄구의 발견은 백제의 사리장엄 봉안 의례와 백제의 역사와 문화적 위상 등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백제에 관한 고고학 최고의 성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석탑건축과 뛰어난 공예기술은 그 시대 동방의 문화강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황제사상, 성(聖)사상, 신선사상이 그것이다.

황제사상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대왕폐하'란 말이 나온다. 이미 백제 무령왕릉 지석에 계묘년(523년)에 '崩(붕)'했다는 용어가 쓰였다. 그런데 이번 금제사리봉안기는 백제의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과 같이 황제와 같은 의미로 '폐하'로 부른 사례이다. 곧 '대왕폐하'란 말을 통해 백제 무왕이 황제체제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태왕이라고 칭한 것과 같다.

성(聖)사상

석탑의 2층 옥개받침석을 해체하던 중에 ‘奉聖봉성’ 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백제에 있어서 이 성(聖)은 곧 미륵이며, 현실에서는 계백과 함께 목숨 바쳐 싸운 5천 인의 군사들이며, 이들이 곧 사사(死士)이며 백제의 화랑이라고 본다. 이들 백제의 화랑은 신라의 ‘화랑국선’과 같다고 본다.

신선(神仙)사상

신라 진흥왕(540~576)시대의 미륵선화가 백제 무왕시대에는 미륵삼존으로 나타났다. 이들 신라의 미륵선화는 신선(神仙)을 숭상했다. 백제 무왕 35년(634년)은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여 섬을 쌓았다고 했다. 이는 삼신산의 하나로서 신선을 숭상했다는 뜻이다.

전북국학원의 제4회 학술회의에서 우대한 박사가 “익산 미륵사지석탑을 통해 본 백제의 선불습합 문화”를 주제로 발표했다. [사진=전북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전북국학원의 제4회 학술회의에서 우대한 박사가 “익산 미륵사지석탑을 통해 본 백제의 선불습합 문화”를 주제로 발표했다. [사진=전북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이어 우대한 박사가 “익산 미륵사지석탑을 통해 본 백제의 선불습합 문화”를 주제로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한민족 고유의 전통문화가 존재하였다. 이를 선도, 또는 신선도라고 하는데 한국 고유의 선도문화 핵심은 천지인 사상이다. 모든 우주 만물은 하나에서 나왔으며 그 하나에서 천지인이 나왔다는 이 사상이 수리문화와도 연결되어 일.삼.구를 신성한 수로 여겼다. 나아가 오(5)과 칠(7)도 역시 성수로 여겼다. 1, 3, 5, 7, 9 등 홀수로 나가는 이 수리문화는 중국의 2, 4, 6, 8로 이어지는 짝수문화와 비교된다.

이러한 문화의 영향으로 불탑의 층수도 3, 5, 7, 9층으로 건축하였다. 특히 9의 숫자는 완성수로 여겨서 중용한 불탑을 지은 때 9층으로 지은 것이 전통이었다.

9층불탑의 가장 유명한 사례가 신라의 황룡사9층탑이다. 567년 진흥왕 시기 짓기 시작하여 645년 선덕여왕 땡 완공했다고 알려진 이 황룡사9층탑은 신라 주위의 9개 나라를 평정하고 신라가 대제국이 되는 꿈을 이루려는 의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탑의 층수를 완성수인 9에 맞춘 것이다. 익산미륵사지9층석탑도 마찬가지로 추측된다.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을 폈던 백제 무왕은 백제의 웅대한 통일제국의 의지를 거대한 미륵사지9층석탑에 담았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를 선불습합문화라고 한다. 불교문화와 선도문화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융합하여 독특한 문화가 창출된 현상을 말한다. 익산미륵사지9층석탑은 이러한 선불습합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불습합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풀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고대문화 유적이 매우 많다. 아니 이 선불습합문화로 이해해야 우리의 고대 불교, 유교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전북국학원 이번 학술회의를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비대면으로 개최하고, 동영상 촬영 후 전북국학원 유튜브에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