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체계적인 정리를 시도한 첫 번 째 책 나왔다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체계적인 정리를 시도한 첫 번 째 책 나왔다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0.11.0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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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김진한 박사,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간)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은 고구려의 ‘내정(內政)’과 ‘외정(外政)’을 상호 연동하여 바라봄으로써 시기별로 고구려 안팎의 모순관계가 어떻게 귀결되어갔는지 검토한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김진한 지음, 18,000원)를 발간했다.

저자 김진한은 경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고대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나라들 간 교류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주요 논저인 「고왕 후기 발해의 대당관계와 국호의 변경」(2020), 「여석 이기백의 학문과 한국사인식」(2019), 「철원 고석정 신라비와 신라의 철원 진출」(2018), 《발해 유적 사전-중국편》(공저, 2015) 등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 고대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신진 학자 중 하나다.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표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표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대외관계’ 즉, ‘외교’는 고구려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이다. 오늘날 전하는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에서 중국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국가, 멀리 중앙아시아 등의 문화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고구려의 국제성 및 개방성을 드러낸다. 또한 이는 고구려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외관계가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구려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하여, 서・북쪽은 대륙, 남쪽은 반도, 동쪽은 바다와 접해 있었다. 고구려는 선진 국가였던 고조선과 부여의 터전에서 이들 문화를 초석으로 삼아 주변 여러 나라와 투쟁하고 교류하며 성장해왔다.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는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제관계가 맞물려 상호 연동하며 전개되었다. 김진한의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는 고구려의 ‘내정’과 ‘외정’을 상호 연동하여 바라봄으로써 시기별로 고구려 안팎의 모순관계가 어떻게 귀결되어갔는지 검토했다.

저자 김진한이 이 책에서 검토한 시기는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대외관계를 맺기 시작한 5세기부터 신라・당 연합군에 멸망한 668년까지이다. 세부적으로는 정국주도권의 변화 양상과 국제 정세의 변동을 고려하여 ‘전제왕권기-귀족연립정권기-왕권강화기-연씨가문집권기’로 구분했다.

또한, 공간 범위는 동진・남북조・수・당 및 유연・돌궐・설연타 등 중원왕조와 유목제국을 두루 포함한 서북방지역, 신라・백제・가야・왜의 남방지역, 거란・말갈・물길・실위・해・지두우 등이 활동한 요해지역이다. 다만 대외관계 대상은 지리적 위치와 역관계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에 인식되는 중요도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그 층위를 달리하여 다뤘다. 이 책은 국제관계의 연동성에 주목하는 ‘역(학)관계론’을 기본 시각으로 한다.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는 그동안 자료의 특성상 대백제·신라관계와 대남북조관계, 수·당전쟁을 중심으로 논의를 집중되었다. 최근 들어 고고자료가 축적되고 다양한 연구시각에서 유연, 돌궐, 거란 등 북방 여러 나라와의 관계에 접근함으로써 상당한 연구의 진척을 이루었다. 다만 개별·분산적으로 연구가 진행된 까닭에 체계적인 이해 틀을 갖추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더욱이 대외관계 기록을 좀 더 명확하고 균형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내정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부분적인 언급에 그쳤다.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표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표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를 시도한 첫 번째 책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부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재위 413~491)이 즉위한 5세기 전반~6세기 전반의 정국과 대남북조외교의 전개 과정을 살폈다. 장수왕은 79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평양 천도를 단행하고 귀족을 숙청하며 전제왕권을 구축해나갔다. 이 시기 중원대륙은 5호16국의 혼란한 시대를 벗어나 남북조시대로 접어들었고 북아시아 몽골초원에서도 유연이 세력을 떨치며 등장했다. 고구려는 이러한 다자 간 세력 구도 속에서 천손의식을 바탕으로 고구려적 천하관을 완성해나가며 동방의 유력국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왕권은 제21대 문자왕 대(재위 491~519)를 지나면서 약화되었다. 이는 장수왕 대에 왕위 계승의 안정성을 위해 단행한 대대적인 귀족 숙청과 문자왕 대에 악화되기 시작한 남북방관계가 고구려 내부의 불안감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2부는 귀족연립정권의 성립과 대외관계를 살펴보았다. 531년 제22대 안장왕(재위 519~531)이 피살된 뒤, 귀족들이 제23대 안원왕(531~545)을 추대하여 즉위하게 했고 이로써 귀족연립정권이 성립했다. 안원왕 대의 잦은 천재(天災)로 인한 정국 불안은 왕위 계승 분쟁으로 비화되었고, 추군 측의 지원을 받아 제24대왕 양원왕(재위 545~559)이 즉위했다.

한편, 6세기 전반 육진의 난으로 북위가 동・서위로 분열되었으며 북방에서는 유연이 몰락하고 돌궐이 등장하는 등 대륙 정세가 크게 요동쳤다. 이와 연동하여 한반도 내 백제・신라연합군이 고구려가 장악한 한수 유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원왕은 고구려 안의 위기를 밖의 위기로 극복하고자 노력했고 이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3부는 제25대 평원왕 대(재위 559~590) 이후 왕권의 강화와 수의 중원통일에 따른 대외관계의 변동을 살폈다. 평원왕 대에 고구려 국정은 안정을 되찾았으나, 돌궐이 등장하여 북방을 장악하면서 국제관계가 재편되었다. 이와 함께 신라가 남북조에 사신을 보내며 국제무대에 등장했고 백제도 북조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6세기 후반, 돌궐이 분열되고 수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국제관계는 또 다시 재편되었다. 그런 가운데 고구려는 수나라에 대해 강경정책을 취하며 고구려적 질서를 지켜나가기 위해 수나라와 네 차례 전쟁을 치렀다.

4부는 대당관계를 중심으로 고구려가 멸망까지 이르는 과정을 살폈다. 제27대 영류왕 대(재위 618~642)에 고구려는 대수전쟁에 따른 과제를 안은 채 출발했고 대당전쟁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있었다. 고구려의 대당관계는 630년 당 태종이 동돌궐을 복속한 것을 계기로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이후 대외적 긴장감이 높아져가는 가운데 대대로(大對盧) 선출과 왕실의 후계 구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제28대 보장왕(재위 642~668) 즉위 이후 연개소문정권은 대당강경책을 유지했다. 그런 가운데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집권했지만 곧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라・당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고구려의 대외 관계는 자료의 특성상 신라, 백제,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그래서 유연, 돌궐과 같은 북방 여러 나라에 대한 연구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중국 및 러시아의 개혁 개방에 힘입어 북방지역에 대한 접근이 비교적 쉬워지고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고고자료와 금석문 자료가 상당히 축적되었다. 이에 따라 북방관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는데, 이 책도 그러한 관심을 반영한다.

한국 고대사, 특히 고구려사는 자료가 빈약하고, 그 활동범위가 북한, 중국, 러시아까지 퍼져있기 때문에 연구가 쉽지 않다. 이로 인해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국가 중점 프로젝트를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사, 특히 후기의 외교와 내정 간의 관계 속에서 고구려사의 대외관계를 연구한 신진 학자의 이번 연구는 고구려사를 한국사로서 인식하고 학술적으로 검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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